- 거문도(巨文島)를 말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 전남 여수와 제주도 중간쯤에 자리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 하지만 거문도는 일찍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울릉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곳이다.
- 지리 전공 교사들 모임인 ‘남도 터사랑 연구회’ 회장 유성종 씨가 거문도-울릉도-독도의 이색적인 ‘삼각관계(?)’를 다룬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거문도 전경.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울릉도로 나는 간다/ 오도록만 기다리소 이번 맞고 금쳐 놓세 술비여어
돛을 달고 노 저으며 울릉도로 향해보면/ 고향생각 간절하네 이번 맞고 금쳐 놓세 술비여어’
(에헤에 술-비)
‘어기영차 배질이야 어기영차 배질이야/ 울고 간다 울릉도야 어기영차 배질이야/ 이물에 이사공아 고물에 고사공아/ 허리띠 밑에 하장이야 돛을 달고 닻 감아라’
전라남도 남해안의 외딴섬 거문도의 뱃사람들이 고된 뱃일을 하며 부르던 ‘술비소리’의 한 구절이다. 언뜻 생각하면 동해 먼 바다에 있는 울릉도와 남해안의 거문도는 지도상으로만 봐도 너무 멀고 먼 땅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두 섬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 듯싶다. 풍선(風船)을 이용해야만 바다를 오갈 수 있었던 조선 말기에 이런 노동요(勞動謠)가 불려졌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동북아시아에서 부동항(不凍港)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1885년 4월 영국군은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다.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거문도를 탐낸 이유는 거문도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항로의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조선 본토와 멀리 떨어져 행정력이 미약하다는 점, 그리고 3개의 섬(동도 서도 고도)이 둥그렇게 모여 수심이 깊은 내해를 이루면서 군함 등 대형 선박의 접안이 용이한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중-일 항로 중간에 자리한 탓 서구 열강 거문도 탐내
1861년 만들어진 대동여지도 속의 거문도(빨간색 원).
당시 경략사(經略使·조선 후기 거문도에 진(鎭)을 설치하기 위해 임시로 둔 벼슬)였던 이원회는 영국군 철수 직후 거문도 주민들에게 영국군 점령 기간의 노고를 위로하려다 “노임과 먹을 것을 주고 일을 시켜 좋았다. 앞으론 거저 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고 놀란 일도 있었다.
당시 고종은 이원회의 보고를 듣고 “그럼 그 섬을 오래도록 점령하라 할 것을 그랬지? 하지만 국가 체면상 안 될 말씀이외다. 그럼 어디 다른 나라에 주었으면 좋겠는데… . 듣자 하니 미국이 우리나라와 친하겠다고 한다는데 그들에게 주도록 하라”고 지시했으나 “지금 문제가 된 곳을 갖고 싶지 않다”는 미국 공사의 거절로 무산됐다. 한국 근대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문도 사람들의 울릉도 원행(遠行)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거문도는 구릉지가 많고 토양층이 얇으며 바람이 세기 때문에 큰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당연히 집 짓고 배를 건조할 나무가 부족해 이를 구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는데, 가까운 육지나 섬들은 관리자가 있어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거문도 사람들이 찾은 곳이 바로 울릉도였다. 울릉도는 당시 조정에서 입도(入島)를 금지하던 섬이었는데, 울창한 숲과 해산물이 풍부해 왜인(倭人)들이 몰래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제멋대로 어로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항해에 능하고 진취력이 강한 거문도 사람들에겐 울릉도가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거문도 사람들은 동남풍과 동한난류를 이용해 울릉도로 향했다. 보름에서 한 달이 걸리는 긴 여정. 출발 전엔 세 말의 콩을 볶아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긴 항해 기간에 키를 잡은 사공의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거문도 사람들은 도착 직후부터 나무를 베어 새 배를 만들었고 여름내 미역을 채집했다. 가을철 하늬바람(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말린 고기를 가득 싣고 남하하면서 지나온 경상도 포구에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며 귀향했다. 거문도에 도착하고 나서는 뗏목(목재)만 남겨두고 곧바로 서해로 나가 어로활동과 함께 울릉도의 건어물과 해조류를 서해안 곳곳의 포구에서 팔았다. 이들의 활동범위는 진남포까지 이어졌고, 마포나루와 금강하구에도 들러 생필품과 쌀을 구해왔다.
1890년 임명된 울릉도 초대 도감은 거문도 사람인 오성일
왕의 명(命)을 받고 울릉도를 살피러 갔던 검찰사 이규원이 쓴 ‘울릉도 검찰일기’(1882년 4월30일~5월13일)를 보면, 이규원이 답사기간에 직접 만난 거문도와 초도 사람은 서로 다른 다섯 장소에서 무려 84명이나 됐고, 주로 배를 건조하거나 해초를 채취하고 있었다고 돼 있다. 이규원은 벌목하러 온 한 무리의 왜인들을 만나 필담으로 왜인 78명이 당시 울릉도에 불법 입도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해변 바위산 등성이에서 ‘대일본 제국 송도규곡’이라 쓰인 표목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은 왜인들의 빈번한 울릉도 불법 침입을 우려해 그때까지의 조정 방침을 바꿔 육지 주민들의 울릉도 이주를 장려했으며(울릉도 개척령, 1882년), 배를 건조하되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그리고 울릉도를 관할할 관리인 도감을 임명했는데 초대 도감으로 거문도 서도리 사람인 오성일이 교지를 받기도 했다(고종 27년, 1890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거문도엔 100년도 훨씬 넘은 울릉도 목재(노간주나무·귀목)로 지어진 집과 절구통, 다듬이, 홍두깨 등이 많이 남아 있었다. 또한 거문도 사람들은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울릉도 및 독도 근해 어장에서 오징어 채낚기 작업을 많이 했고, 지금도 서도리 장촌마을에 가면 당시 뱃일을 했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거문도 사람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여전히 다정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