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주 우정워크’라고 새겨진 노란색 인식표를 둘러멘 일주팀의 뒷모습. 이들은 하루 7시간을 걷는 강행군으로 5월31일 부산 도착을 눈앞에 두고 있다. 참고: 이들이 걸어온 행적을 기록한 일본어 홈페이지 주소 (http://www016.upp.so-net.ne.jp/kinchan/)
60대 이상의 일본인 7명이 ‘2005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여 4월1일부터 5월31일까지, 무려 60일간 대한민국 국토 1500여km를 걷겠다고 나섰다.
1500km? 이 수치를 접한 한국인이라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너무 긴 여정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1990년대 이후 급증한 ‘한반도 종주 행사’는 대개 경상도 끝에서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598.6km나, 동해안 쪽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800여km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1500km라는 장대한 여정을 위해 과연 어떤 코스를 택한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동해안을 따라 정동진과 주문진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진로를 바꿔 서울로, 그리고 자연스레 서해안을 따라 목포로 향하고 이후 남해안을 따라 부산에 당도한다는 것. 한국의 건장한 청년도 구상하기 힘든 ‘한반도 풀코스’ 계획만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 충분한데, 그것도 평균 연령 65세라는 고령의 일본인들이 계획했다니 호기심이 배가된다.
평균 나이 65세, 하루 30㎞씩 60일간의 여정
애당초 일본인 7명과 한국인 1명으로 구성된 ‘한국일주 우정워크’팀(이하 일주팀)은 전날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15일 아침
7시 전남 목포를 출발했다. 이후 단 7시간 만에 37km 떨어진 성전에 도착했다. 한 시간에 5km 이상 걷는 대단한 속도전이다. 참가자의 리더가 74세인 점과 이들의 평균 나이가 65세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 30km씩 60일간 여정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걷기에 쏟아온 열정은 1500km라는 대장정마저 소박한 코스로 만들 만큼 거창한 것이었다.
“웬걸요. 우리 팀은 99년부터 2년간 일본 전국을 일주한 ‘이노우 워크’의 주도 멤버입니다. 에도 시대에 근대 일본 지도를 작성한 이노우 다다요시의 실적을 기려, 아사히신문사와 일본 워킹협회가 함께 주최한 행사였죠. 일본 전역 766개의 시·읍·면을 연결해 총 참가인원 17만명이 11030km를 걸었습니다. 기상과 체력 면에서는 젊은 사람 못지않습니다.”(가나이 미키오 씨)
(1) 신문기사를 보고 합류한 한국인 김인순씨. (2) 엔도 야수오(기록 담당). (3) 나이 미키오(사진 담당). (4) 모리 도모히코(코스 담당). (5) 가와타 시게루(숙박 담당). (6) 한국체육진흥회 원일섭 지회장(지원). (7) 니시카와 아라오(일주 팀장). (8) 노요리 로쿠로.
참여한 이들의 면면만으로도 이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인 아사히신문이 그간 꾸준하게 걷기 운동을 홍보했기 때문인지, 이번 일주 팀에도 아사히출신이 두 명이나 참가했다. 스포츠부장 출신으로 88서울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했다는 엔도 야수오(62) 씨와 사진부장을 지낸 가나이 미키오(61)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신문기자 출신답게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노트와 디지털 카메라에 꼼꼼하게 담고 있었다.
‘제2의 인생’이라는 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강원도 원주에서 ‘한국체육진흥회’가 주최하는 한국 걷기 행사나 중국 걷기 행사에 꾸준하게 참가해왔다. 이번 한국행도 거기서 비롯됐다. 올해 초 평택에서 아산까지 27km 걷는 길에 만난 니시카와 아라오 씨와 가와타 시게루 씨가 “올해가 ‘한-일 우정의 해’이니 한국 땅 전체를 일주해보자”며 의기투합한 것.
“한국과 일본의 풍광이 이렇게 비슷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모리 도모히코 씨)
한적한 시골 마을의 여관 앞에서 바라본 풍광이 일본 전원 풍광과 너무도 닮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먹고 곧장 간단한 체조를 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두 나라 평화롭게 발전하길 기대”
첫 번째 문제는 한국인 참가자 등 총 10여명이 두 달간을 움직이는 큰 행사이기 때문에 짐의 양이 적지 않다는 것. 이 문제는 한국 걷기 문화를 주도해온 한국체육진흥회가 해결했다. 얼마 전 북극점 도달에 성공한 박영석 씨 소유의 차를 선뜻 이들에게 내어놓은 것. 여행가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걷는 운동에 무슨 특별한 준비랄 게 있을까 의아했는데, 그런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일단 장비만 해도 세심한 정성이 필요했다. 워낙 긴 일정에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땅, 특히 위험한 차도 옆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차량 운전자에게 도보 여행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인식표가 필요했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한 방수 발싸개 역시 필수장비. 그리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숙련된 지도 해석 능력, 그날의 일정을 기록해야 하는 기록 담당, 긴급 의료장비 담당은 물론 숙박·식사문제를 해결할 당번 등 촘촘한 팀워크가 필수적이다.
기자가 동행한 당일 28km 구간에는 수확 직전의 보리가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었다. 5월 햇살치고는 따가운 햇살이 여정을 방해하는 듯 보였지만, 이들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고 반기며 연신 주변을 살핀다. ‘한-일 우정의 해’ 기념답게 이들은 거리에서 주민들과 마주칠 때면 연신 “반갑습니다, 일본에서 왔습니다”고 크게 소리쳤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물론 대환영이다. 정치 문제만 빠진다면, 역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 반가움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정 45일째, 성전을 출발해 강진을 향해가는 모습.
“사실 독도 문제 때문에 여정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민감해서 우리의 순수한 민간 행사가 퇴색될까 걱정스러웠지요. 그런데 막상 길을 걸어보니 따스한 한국민들의 환대에 감동했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엔도 야수오 씨)
연금으로 생활하는 이들이 이번 여행을 위해 모은 돈은 각자 60만엔, 한국 돈으로 600만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엔도 씨는 “매운맛을 좋아하고,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번 도보 여행 참가자를 제한했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독도 문제’라는 한-일 간 최대의 난제로 인해 더 많이 홍보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아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걸으면서 바라본 봄날의 한국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길에서 우리를 격려해준 한국 분들에게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아름다운 길을 걷는 한국인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하기도 합니다. 한-일 관계가 어려운 국면에 있지만, 두 나라가 평화롭게 발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