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라인.
삼성전자가 이렇게 세계 증시를 달구고 있는 사실은 ‘놀라운 동시에 당연한’ 일이라는 양면적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세계 시장에 이 정도 영향을 미치는 기업이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갓 넘은 ‘중진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이는 ‘코리아(Korea)’라는 단어에는 고개를 갸우뚱해도 ‘삼성(SAMSUNG)’이라면 금방 끄덕이는 유럽인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과도 통한다.
국내 수출 20% 차지 초우량 기업
그러나 삼성전자라는 세계적 초우량 기업을 따로 떼내 단면을 살펴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한 주에 평균 한 개꼴로 쏟아내는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신제품과 신기술. 세계 메모리시장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반도체 생산 규모와 매출. TFT-LCD, 휴대전화 단말기 등 첨단 정보기술(IT) 산업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선두권을 달리는 견고한 사업구조. 순익 100억 달러를 넘어선 세계 아홉 번째이자 아시아 두 번째 IT 업종 최초의 기업.
이쯤 되면 세계 증시에 ‘삼성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삼성전자는 2004년 매출 57조6824억원에 영업이익 12조169억원, 순이익 10조7867억원을 냈다. 2003년과 비교하면 매출 32%, 영업이익 67%, 순익은 81%나 늘어난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이다. 순익을 달러화로 환산하면 약 103억 달러. 전 세계 기업 가운데 아홉 번째로 100억 달러 이상의 순익을 내 이른바 ‘100억 달러 클럽’에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1월14일 기업설명회(IR)를 통해 2004년에 비해 34% 증가한 10조2700억원을 2005년 설비투자 계획으로 잡았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주우식 IR팀장(전무)은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올해도 호조가 지속될 것이고, 통신 부문도 휴대전화 단말기를 중심으로 2004년 4분기와 비교할 때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LCD 수요도 하반기에는 회복될 것으로 보여 전반적으로 올해 상황은 나쁘지 않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라는 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삼성전자의 수출액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국내 직수출 기준)를 차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국내 600대 기업의 올해 설비투자 계획 가운데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15%에 이른다. 종합적으로 볼 때 우리 경제의 1할쯤을 차지한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가 아닐 정도다.
2004년 8월12일 그리스 아테네 삼성올림픽홍보관 개막식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회장(오른쪽)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왼쪽).
삼성전자가 세계 IT 시장에서 우뚝 서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4개 사업을 정리하고 반도체와 LCD, 휴대전화에 경영 자원을 집중한 ‘결단’ 때문이다. 그때까지 긴가민가하던 삼성의 간부들도 지금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방향 설정에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다. 그것이 시장을 보는 탁월한 감각에서 나온 것이든 우연히 시장 흐름에 맞아떨어진 것이든 삼성전자는 성공했고, 지금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불안정한 지배구조-후계구도
‘한 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회장 특유의 천재론과 엔지니어 출신을 우대하는 기술제일주의, 10년을 집요하게 매달려온 ‘디자인 혁명’. 흔히 삼성전자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는 인재, 기술, 디자인의 3대 축 역시 사업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전제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반도체’에 ‘올인’한 이 회장의 결단은 삼성의 오늘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러나 모든 중대한 사안을 ‘총수의 결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오너 경영체제는 삼성전자의 결정적인 한계일 수 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라는 거대 기업을 오너로서 지배하고 있지만 실제로 개인이나 일가가 소유한 지분은 얼마 안 된다. 이건희 회장 및 특수 관계인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23.4% 가운데 자사주를 제외한 의결권 지분은 17.8%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 지분이 8.93%, 삼성물산 지분이 3.94%에 이른다.
개정된 공정거래법이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을 단계적으로 제한하게 되면 2008년부터 금융 계열사 지분 가운데 2.8%는 무용지물이 된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1월17일 현재 54.37%에 이른다.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를 삼성의 ‘엄살’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경영권 승계가 생각보다 순조롭지 못하다는 점도 여기에 맞물려 있다. 이 상무는 현재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최상부에 있는 계열사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있지만 아직 소송 또는 기소 중인 사안들이 몇 가지 있다. 변칙 상속 증여와 관련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이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에게서 경영권을 넘겨받을 당시와 기업 환경이 전혀 다르다는 점도 부담이다.
환율 등 외생변수도 큰 문제
더 가까이, 더 직접적으로 삼성전자의 경영 실적을 흔들 수 있는 요인도 있다. 삼성전자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가장 큰 변수는 환율이다. 삼성은 올해 기준 환율을 달러당 1050원으로 잡았지만, 이미 환율은 달러당 1030원대로 떨어졌다. 환율이 10원 떨어질 때마다 삼성전자의 이익은 한 해 약 2000억원씩 줄어든다.
삼성전자의 가장 큰 사업 부문인 반도체와 LCD 등의 경기 사이클도 문제다. 삼성 측은 올해까지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경기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갑자기 수요가 줄어 값이 급락할 경우 삼성전자가 내놓은 모든 사업전망은 어긋나게 된다. 이러한 최악의 경우에도 삼성전자는 투자를 줄이기 어렵다. 반도체 사업은 손해를 보더라도 한 해 수조원대의 시설과 연구개발 투자를 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순식간에 경쟁업체들에 따라잡힌다. 1위 삼성전자와 2위 그룹인 미국, 유럽 업체 간의 기술 격차는 겨우 3~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올해 100억 달러를 넘게 벌었더라도 반도체 경기가 2~3년 내리막길을 타면 잉여 재원을 고스란히 까먹게 된다. 일본의 몇몇 IT 업체들이 진작 반도체 사업을 포기한 이유도 사실 그만큼 투자에 따른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 기업이며 세계 IT 산업의 리더로 떠오른 삼성전자가 이 모든 문제들을 헤치고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기를 기대하지만, 메워야 할 골이 깊고 어깨에 올려진 짐의 무게도 만만치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