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좀 독특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오이냉채가 있기에 국수를 삶아 거기에 말았더니 뜻밖에 시원한 오이냉채 국수가 되었다. 열무김치 국수는 위장을 자극하는 매콤한 맛으로 먹지만 오이냉채 국물에 만 국수는 그윽하고도 삼삼한, 담백한 맛으로 먹는다.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사로잡아온 시 한 구절 같은 맛이다. 어느 원전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모르나 나는 그 시 구절을 수년 전 산중 암자의 수행자한테서 들었다. 한 번 들었는데도 잊혀지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 깊은 곳을 그윽하게 적셨음이 분명하다.
‘청산은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靑山應笑白雲忙).’
몇 달 전의 일이다. 나는 이 구절의 원전을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에서 한문을 강의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논어’나 ‘명심보감’ 등의 원전을 여러 권 번역한 실력 있는 후배인 그는 내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초의 선사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원문을 팩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후배가 보내온 초의 선사의 시 원문을 보니 의문 하나가 풀렸다. 초의 선사가 위의 시 구절을 창작한 배경이 이해되었다. 초의 선사가 친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날이 어두워져 이끼 낀 바위 아래서 하룻밤을 보내며 느낀 감상을 읊조린 시로, 청산처럼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공연히 분주하게 사는 자신을 떠돌아다니는 흰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나는 바로 볼펜을 꺼내 그 시 구절을 종이에 적었다. 비록 졸필로 씌어졌지만 그 뜻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아왔으니 누가 본다 한들 어떠랴 싶어 작업실 벽에 붙였다. 초의 선사의 그 시 구절은 산중에 사는 나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될 것도 같았다.
몸은 산중에 있지만 마음은 저잣거리를 바쁘게 떠돌 때가 많으니 나 역시 초의 선사가 본 흰 구름과 다를 바 없었다. 무슨 일을 작심하고 시작할 때는 온몸을 던져보려고 하지만 곧 그 일에 전념하지 못한 채 이런저런 망상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실상을 알지 못하고 내 산중에서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절대로 그럴 일이 못 된다. 저잣거리에서 살려면 누구라도 시간에 쫓기지 않을 수 없고, 몸이 바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몸은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이 청산처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붓다란 인도 말로 ‘눈을 뜬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교라는 종교에 갇힌 말이 아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직접 들었는데 지금도 인도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임을 알 수 있었다. 힌두교를 믿는 어떤 경찰관이 나에게 자신은 아침마다 붓다가 된다고 농담을 걸기도 했다. 왜냐고 묻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까 아침에만 ‘붓다’가 된다며 웃었다.
바쁜 ‘흰 구름’보다 묵묵한 ‘청산’처럼 살고파
만약 나의 사랑채인 무염산방 기둥에 주련(柱聯)을 하나 단다면 바로 ‘靑山應笑白雲忙’을 써서 달고 싶다. 바삐 움직이다 자기를 허물고 마는 흰 구름이 되기보다는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청산을 닮고 싶다. 사실 내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남도 산중으로 내려온 것도 시간에 끌려 다니지 않는 나만의 중심이 확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최근에 초의 선사의 이 구절을 감상하다 문제 하나를 발견했다. 방 벽에 붙여놓고 오며 가며 음미하다 보니 ‘청산이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산이 흰 구름을 보고 비웃기보다는 그냥 슬쩍 미소를 지었을 것만 같다. 청산은 이미 시비를 초월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번역을 다시 해보았다.
‘저기 깊은 산이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미소하네.’
청산을 ‘깊은 산’으로, 비웃다를 ‘미소하다’로 바꾸고 보니 품격이 생기는 것 같은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음식 맛을 얘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자구에 대한 그럴 듯한 해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마음자세다. 자신이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건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청산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사로잡아온 시 한 구절 같은 맛이다. 어느 원전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모르나 나는 그 시 구절을 수년 전 산중 암자의 수행자한테서 들었다. 한 번 들었는데도 잊혀지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 깊은 곳을 그윽하게 적셨음이 분명하다.
‘청산은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靑山應笑白雲忙).’
몇 달 전의 일이다. 나는 이 구절의 원전을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에서 한문을 강의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논어’나 ‘명심보감’ 등의 원전을 여러 권 번역한 실력 있는 후배인 그는 내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초의 선사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원문을 팩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후배가 보내온 초의 선사의 시 원문을 보니 의문 하나가 풀렸다. 초의 선사가 위의 시 구절을 창작한 배경이 이해되었다. 초의 선사가 친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날이 어두워져 이끼 낀 바위 아래서 하룻밤을 보내며 느낀 감상을 읊조린 시로, 청산처럼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공연히 분주하게 사는 자신을 떠돌아다니는 흰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나는 바로 볼펜을 꺼내 그 시 구절을 종이에 적었다. 비록 졸필로 씌어졌지만 그 뜻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아왔으니 누가 본다 한들 어떠랴 싶어 작업실 벽에 붙였다. 초의 선사의 그 시 구절은 산중에 사는 나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될 것도 같았다.
몸은 산중에 있지만 마음은 저잣거리를 바쁘게 떠돌 때가 많으니 나 역시 초의 선사가 본 흰 구름과 다를 바 없었다. 무슨 일을 작심하고 시작할 때는 온몸을 던져보려고 하지만 곧 그 일에 전념하지 못한 채 이런저런 망상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실상을 알지 못하고 내 산중에서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절대로 그럴 일이 못 된다. 저잣거리에서 살려면 누구라도 시간에 쫓기지 않을 수 없고, 몸이 바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몸은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이 청산처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붓다란 인도 말로 ‘눈을 뜬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교라는 종교에 갇힌 말이 아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직접 들었는데 지금도 인도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임을 알 수 있었다. 힌두교를 믿는 어떤 경찰관이 나에게 자신은 아침마다 붓다가 된다고 농담을 걸기도 했다. 왜냐고 묻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까 아침에만 ‘붓다’가 된다며 웃었다.
바쁜 ‘흰 구름’보다 묵묵한 ‘청산’처럼 살고파
만약 나의 사랑채인 무염산방 기둥에 주련(柱聯)을 하나 단다면 바로 ‘靑山應笑白雲忙’을 써서 달고 싶다. 바삐 움직이다 자기를 허물고 마는 흰 구름이 되기보다는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청산을 닮고 싶다. 사실 내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남도 산중으로 내려온 것도 시간에 끌려 다니지 않는 나만의 중심이 확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최근에 초의 선사의 이 구절을 감상하다 문제 하나를 발견했다. 방 벽에 붙여놓고 오며 가며 음미하다 보니 ‘청산이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산이 흰 구름을 보고 비웃기보다는 그냥 슬쩍 미소를 지었을 것만 같다. 청산은 이미 시비를 초월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번역을 다시 해보았다.
‘저기 깊은 산이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미소하네.’
청산을 ‘깊은 산’으로, 비웃다를 ‘미소하다’로 바꾸고 보니 품격이 생기는 것 같은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음식 맛을 얘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자구에 대한 그럴 듯한 해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마음자세다. 자신이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건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청산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