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찾았던 30대 임산부 N씨. 제왕절개로 출산한 후 안정을 취하던 그는 30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혈전 색전증. 폐동맥이 혈전에 막혀 피의 순환이 중단되는 증상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분노한 유가족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수년간 계속된 공방은 지난 5월29일 대법원이 “의료과실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마침내 마무리 되었다. 가슴 통증과 급성 호흡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났음에도 부작용을 우려해 혈전 용해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지난 96년 11월에 태어난 J군. 그러나 J군은 출생 이후 잠깐을 제외하고는 다시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C대학병원에서 미숙아로 출생해 2개월간 인큐베이터 신세를 진 아이가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것. 뒤늦게 실명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서둘러 다른 병원에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난 5월8일 대법원은 수술을 했음에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은 데 대해 병원측이 관리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적절한 시기에 검사를 시행하고 징후를 살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
언뜻 평범해 보이는 최근의 두 대법원 판결이 법조계와 의료계에 상당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의료사고에 대한 법원 판단이 병원측 주의 의무를 폭 넓게 해석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라는 것. 과거 유사 사건에서는 병원측이 승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3월 대법원은 “과실 여부에 대한 입증책임 면에서 의료 전문가인 병원 쪽보다는 환자 쪽 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의료분쟁에 관한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는 곳이 없어 단언하기 어렵지만, 수치상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확인이 가능하다. 한해에 제기되는 의료사고 관련 민사소송은 약 600건 정도, 형사소송은 1500건 내외로 알려져 있다. 이 중 50 대 50 수준이던 의사 대 환자의 승소 비율이 최소한 40 대 60 수준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의료법조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추세의 근본적인 이유로는 환자들이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일종의 권력관계이던 의사-환자의 관계가 대등한 위치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 소비자보호원 분쟁조정국 의료팀의 양혜일 차장은 인터넷 등을 통한 의료정보의 대중화, 관련 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다른 요인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의료계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특히 다른 과목보다 의료사고 발생률이 월등하게 높은 산부인과 의사들의 반응은 자못 격렬하기까지 한 상황. 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 이충훈 법제담당 이사는 “색전으로 인한 사망자의 80~90%가 증상 발생 후 한두 시간 안에 목숨을 잃는다”며 짧은 시간 동안 검토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J군 사건 역시, 눈도 뜨지 않는 신생아의 시력을 일일이 체크하고 24시간 인큐베이터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현재의 산부인과 시스템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의사들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들을 수 있다. 같은 협의회의 장중환 의료분쟁담당 이사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유가족에게 돈 많은 의사들이 적당히 배상하고 끝내라는 분위기”라고 성토했다. 유가족들을 달래기 위해 법원이 의도적으로 의사의 책임 수위를 높였다는 것. 병원비를 마음대로 책정할 수 없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모든 부담을 의사들이 떠안는 것은 부당하다고 정이사는 말했다. 의료전문 변호사인 최재천씨(법무법인 한강 대표) 역시 “일정 부분 심정적인 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러한 주장을 수긍했다.
한편 산부인과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의사의 적극적인 진료행위를 가로막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고를 우려한 소극적인 방어진료, 과도한 설명으로 인한 진료시간 축소 등의 부작용은 그대로 환자 몫이 된다는 주장이다. 우리 나라의 제왕절개 비율(43%)이 세계 최고수준인 이유는 자연분만보다 법적 책임을 면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는 전문의도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제왕절개 산모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소비자보호원 등 관련기관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오히려 예방의식의 향상과 그에 따른 사전 준비의 강화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는 반론이다.
한편 의료배상 판결이 늘어감에 따라 의료과실배상책임보험 가입 등을 통해 현실적인 대비책을 마련하는 의사들도 늘고 있다. 보험료를 납입한 의사나 병원이 법정에서 배상판결을 받은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는 이러한 보험제도는 지난 97년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99년 10명으로 시작한 산부인과 보험의 경우 400여 명(전체의 13%) 정도의 개원의가 가입해 있지만 병상 수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보험료를 계산하는 등 아직 초기적인 형태. 사고 발생률이 적은 내과 개업의의 보험료가 연 60~70만 원 정도인 데 비해 산부인과는 연 400~500만 원 수준으로 비교적 높지만 현실적인 필요를 느낀 의사들이 많아 가입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의료과실배상책임보험의 역사는 길다. 독일·프랑스 등은 19세기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으며, 일본은 60년대에 시작해 가입률이 70%에 이른다. 법조계에서는 보험가입의 확산이 “궁극적으로 환자와 의사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막을 수 있는 안전판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재판정에서 동료 의사의 과실 여부를 증언할 전문의를 찾기 힘든 현재의 ‘집단이기주의 분위기’ 역시 보험이 일반화하면 크게 완화할 것으로 보이는 등 보험 도입으로 인한 장점은 적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부에서는 과실 유무가 불분명하거나 과실이 없는 경우에 대해서도 환자나 유가족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무과실보험’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장중환 이사는 “지금처럼 의사의 법적 책임을 광범위하게 해석해 유가족을 달래려는 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며 “유가족들이 일단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단체 역시 무과실보험이 현재보다 정교한 분쟁조정시스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무과실보험을 도입할 경우 환자 가족들의 가산을 탕진케 하는 법정소송이 현재처럼 남발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자동차보험제도로 교통사고의 해결이 한층 쉬워졌듯 의료사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쟁점은 남아 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역시 돈 문제. 무과실보험을 만들 경우 재정 부담을 누가 져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 의료계에서는 환자들이 잠재적 수혜자이며 우리 나라의 의료체계가 사회보험 형태라는 점을 들어 건강보험 등 국가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관련기관과 소비자단체에서는 결국 환자들의 부담이 증가하는 셈이므로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법원이 의료분쟁에서 상대적 약자에 해당하는 환자 및 유가족의 손을 들어주는 일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의사들의 불만이 커지며, 1심 판결에만 평균 933일, 2심 판결에 464일이나 걸린다는 의료분쟁소송 건수가 더욱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위의 두 판결을 지켜본 많은 전문가들이 단순히 ‘진보적인 판결’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환영하기보다는, 지난 94년 국회에 처음 상정한 이후 계속 표류하고 있는 의료분쟁조정법을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더욱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96년 11월에 태어난 J군. 그러나 J군은 출생 이후 잠깐을 제외하고는 다시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C대학병원에서 미숙아로 출생해 2개월간 인큐베이터 신세를 진 아이가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것. 뒤늦게 실명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서둘러 다른 병원에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난 5월8일 대법원은 수술을 했음에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은 데 대해 병원측이 관리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적절한 시기에 검사를 시행하고 징후를 살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
언뜻 평범해 보이는 최근의 두 대법원 판결이 법조계와 의료계에 상당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의료사고에 대한 법원 판단이 병원측 주의 의무를 폭 넓게 해석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라는 것. 과거 유사 사건에서는 병원측이 승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3월 대법원은 “과실 여부에 대한 입증책임 면에서 의료 전문가인 병원 쪽보다는 환자 쪽 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의료분쟁에 관한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는 곳이 없어 단언하기 어렵지만, 수치상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확인이 가능하다. 한해에 제기되는 의료사고 관련 민사소송은 약 600건 정도, 형사소송은 1500건 내외로 알려져 있다. 이 중 50 대 50 수준이던 의사 대 환자의 승소 비율이 최소한 40 대 60 수준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의료법조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추세의 근본적인 이유로는 환자들이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일종의 권력관계이던 의사-환자의 관계가 대등한 위치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 소비자보호원 분쟁조정국 의료팀의 양혜일 차장은 인터넷 등을 통한 의료정보의 대중화, 관련 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다른 요인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의료계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특히 다른 과목보다 의료사고 발생률이 월등하게 높은 산부인과 의사들의 반응은 자못 격렬하기까지 한 상황. 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 이충훈 법제담당 이사는 “색전으로 인한 사망자의 80~90%가 증상 발생 후 한두 시간 안에 목숨을 잃는다”며 짧은 시간 동안 검토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J군 사건 역시, 눈도 뜨지 않는 신생아의 시력을 일일이 체크하고 24시간 인큐베이터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현재의 산부인과 시스템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의사들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들을 수 있다. 같은 협의회의 장중환 의료분쟁담당 이사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유가족에게 돈 많은 의사들이 적당히 배상하고 끝내라는 분위기”라고 성토했다. 유가족들을 달래기 위해 법원이 의도적으로 의사의 책임 수위를 높였다는 것. 병원비를 마음대로 책정할 수 없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모든 부담을 의사들이 떠안는 것은 부당하다고 정이사는 말했다. 의료전문 변호사인 최재천씨(법무법인 한강 대표) 역시 “일정 부분 심정적인 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러한 주장을 수긍했다.
한편 산부인과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의사의 적극적인 진료행위를 가로막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고를 우려한 소극적인 방어진료, 과도한 설명으로 인한 진료시간 축소 등의 부작용은 그대로 환자 몫이 된다는 주장이다. 우리 나라의 제왕절개 비율(43%)이 세계 최고수준인 이유는 자연분만보다 법적 책임을 면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는 전문의도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제왕절개 산모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소비자보호원 등 관련기관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오히려 예방의식의 향상과 그에 따른 사전 준비의 강화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는 반론이다.
한편 의료배상 판결이 늘어감에 따라 의료과실배상책임보험 가입 등을 통해 현실적인 대비책을 마련하는 의사들도 늘고 있다. 보험료를 납입한 의사나 병원이 법정에서 배상판결을 받은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는 이러한 보험제도는 지난 97년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99년 10명으로 시작한 산부인과 보험의 경우 400여 명(전체의 13%) 정도의 개원의가 가입해 있지만 병상 수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보험료를 계산하는 등 아직 초기적인 형태. 사고 발생률이 적은 내과 개업의의 보험료가 연 60~70만 원 정도인 데 비해 산부인과는 연 400~500만 원 수준으로 비교적 높지만 현실적인 필요를 느낀 의사들이 많아 가입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의료과실배상책임보험의 역사는 길다. 독일·프랑스 등은 19세기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으며, 일본은 60년대에 시작해 가입률이 70%에 이른다. 법조계에서는 보험가입의 확산이 “궁극적으로 환자와 의사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막을 수 있는 안전판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재판정에서 동료 의사의 과실 여부를 증언할 전문의를 찾기 힘든 현재의 ‘집단이기주의 분위기’ 역시 보험이 일반화하면 크게 완화할 것으로 보이는 등 보험 도입으로 인한 장점은 적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부에서는 과실 유무가 불분명하거나 과실이 없는 경우에 대해서도 환자나 유가족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무과실보험’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장중환 이사는 “지금처럼 의사의 법적 책임을 광범위하게 해석해 유가족을 달래려는 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며 “유가족들이 일단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단체 역시 무과실보험이 현재보다 정교한 분쟁조정시스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무과실보험을 도입할 경우 환자 가족들의 가산을 탕진케 하는 법정소송이 현재처럼 남발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자동차보험제도로 교통사고의 해결이 한층 쉬워졌듯 의료사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쟁점은 남아 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역시 돈 문제. 무과실보험을 만들 경우 재정 부담을 누가 져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 의료계에서는 환자들이 잠재적 수혜자이며 우리 나라의 의료체계가 사회보험 형태라는 점을 들어 건강보험 등 국가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관련기관과 소비자단체에서는 결국 환자들의 부담이 증가하는 셈이므로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법원이 의료분쟁에서 상대적 약자에 해당하는 환자 및 유가족의 손을 들어주는 일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의사들의 불만이 커지며, 1심 판결에만 평균 933일, 2심 판결에 464일이나 걸린다는 의료분쟁소송 건수가 더욱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위의 두 판결을 지켜본 많은 전문가들이 단순히 ‘진보적인 판결’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환영하기보다는, 지난 94년 국회에 처음 상정한 이후 계속 표류하고 있는 의료분쟁조정법을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더욱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