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인 카펠교. GETTYIMAGES
루체른은 우선 걷기에 좋은 도시다. 도시를 걷다 보면 마치 중세와 현재가 서로 비켜나지 않고 공존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의 길은 시간을 따라 흐르고, 풍경은 감정을 따라 스민다. 어느 순간 여행자는 자신이 도시를 걷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천천히 자신에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세시대 상업 중심지
루체른은 작은 도시이지만 산과 호수, 문화와 역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과 햇살이, 여름에는 호수 위 요트와 축제가, 가을에는 단풍이 내려앉은 산책길이,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마켓과 흰 눈이 도시를 채운다. 특히 눈 내린 루체른의 야경은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답다. 조용한 골목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고, 창문 너머로 따뜻한 조명이 새어 나온다.한국에서 루체른으로 갈 때는 취리히국제공항을 경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취리히에서 루체른까지는 열차로 1시간 남짓. 공항에서 곧장 기차를 탈 수 있어 접근이 쉽다. 파리, 밀라노, 뮌헨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도 직행열차나 환승 노선을 통해 쉽게 갈 수 있고, 스위스 내에서는 인터라켄, 루가노, 체르마트 같은 여행지들과 잘 연결돼 있어 스위스 여행의 거점으로 삼기에도 좋다.
루체른은 역사적으로 스위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알프스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14세기 초 스위스 연방이 처음 형성될 때 중요한 연합 도시 중 하나였다. 중세시대 상업 중심지였으며, 종교개혁과 유럽 내 갈등 여파 속에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켜온 곳이다.
지금도 루체른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스위스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 도시를 나타내는 대표 장소는 단연 카펠교다. 14세기에 지은 이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로, 붉은 지붕 아래 오래된 화판들이 고요히 걸려 있다. 강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이 다리를 건너는 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걷는 듯한 경험이다. 다리 끝자락에는 팔각형 모양 워터 타워가 서 있는데 과거엔 감옥과 금고, 망루 역할까지 한 건축물이다. 루체른의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은 저녁 햇살이 카펠교 위에서 강을 물들일 때다. 바람에 찰랑이는 물결 소리, 어슴푸레해지는 골목의 등불, 오래된 골목을 걷는 사람들의 발소리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이 된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돌이 깔린 좁은 골목 사이로 벽화가 그려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중세 상인들의 집, 시 청사, 시원하게 물을 뿜는 분수들과 시계탑들이 이어져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박물관 같다. 그중에서도 루체른의 시간을 보여주는 무제크 성벽은 도시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예술을 좋아하는 이라면 리하르트 바그너가 머물렀던 저택을 개조한 바그너박물관이나 루체른문화예술센터(KKL)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클래식 음악의 도시로도 알려진 루체른은 매년 여름이면 루체른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유럽을 대표하는 교향악단과 연주자들이 이 작은 도시를 찾아와 밤마다 호수 위에 울림을 더한다. 고요한 도시에 쏟아지는 선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 된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머물렀던 저택을 개조한 바그너박물관. GETTYIMAGES
베기스, 피츠나우 등 근교 여행
루체른을 중심으로 반나절에서 하루 코스로 다녀올 수 있는 근교 소도시들도 매력적이다. 대표적인 곳이 바그너가 사랑한 휴양지 베기스와 피츠나우다. 이 두 마을은 루체른 호숫가에 위치해 유람선을 타고 다다를 수 있다. 전통적인 스위스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브루넨, 목조 건축과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 유명한 아인지델른도 가볼 만한 곳이다. 특히 아인지델른은 유럽의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로, 웅장한 수도원과 함께 조용한 골목길, 작은 카페들이 여행자의 시선을 붙든다.루체른은 하루 일정으로 스쳐 지나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다. 가능하다면 이틀에서 사흘 정도는 머물자.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그 자체로 여행의 이유가 된다. 열차를 타고 주변 도시를 둘러보고 늦은 오후엔 테라스 카페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는 시간. 그런 루체른의 속도와 리듬이 여행자에게 진정한 휴식을 알려준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도시의 매력은 더 깊이 다가온다. 삶의 어느 조용한 계절처럼, 알프스의 맑은 공기와 느릿한 일상이 여행자에게 아주 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