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향민들은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냉면을 먹었다. 그래서 휴전선과 가까운 경기 북부에는 실향민들이 창업한 수십 년 역사의 냉면집이 즐비하다. 휴전선과 맞닿은 연천군에는 ‘군만면옥’과 ‘황해냉면’이 있다. 고춧가루 고명으로 유명한 의정부 ‘평양면옥’도 사실은 1970년대 초반 연천군 전곡리에서 창업해 87년 의정부로 옮긴 냉면집이다. 이 식당은 경기 북부는 물론 평양식 냉면업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곳으로, 냉면 위에 뿌린 고춧가루 고명과 얇고 꼬들꼬들한 면발, 날 선 칼처럼 깔끔한 국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춧가루는 육수의 느끼함을 잡아주고 감칠맛을 더하며 속을 따뜻하게 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냉면 명가인 서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도 바로 이곳 의정부 ‘평양면옥’ 주인의 형제자매가 만든 곳이다.
경기 양주 송추삼거리 검문소 주변 식당가에 1980년 자리 잡은 ‘송추평양면옥’은 인근 군부대 군인들과 면회 온 가족들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이 집 육수는 여느 냉면집과 조금 다르다. 의정부 ‘평양면옥’과 달리 복잡한 향과 맛이 난다. 쇠고기 육수에 꿩 육수와 동치밋국을 섞어 쓰기 때문이다. 뒷맛은 은근히 달다. 감칠맛도 상당하다. 얇은 면발도 적당히 탄력 있고 적당히 끊긴다.
원래 평안도 사람들은 겨울이면 동치밋국을 주로 사용했다. 동치미에서 만들어진 천연 탄산의 맛은 사이다보다 쨍하고 상쾌하다. 그렇다고 평안도 사람들이 동치미의 국물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고급 식당에서는 쇠고기 정육만으로 우린 기품 있는 국물을 먹었다. ‘우래옥’과 ‘능라도’의 육수는 이를 바탕으로 한다. 돼지고기 육수를 사용하는 집도 있었다. 서울 남대문의 ‘부원면옥’이 대표적이다. 꿩은 양식이든 자연산이든 겨울이 맛있다. 꿩 국물의 깊은 감칠맛 때문에 ‘꿩 대신 닭’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예전에는 꿩 국물을 사용하는 냉면집이 제법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2012년 불고깃집으로 문을 연 경기 남양주 ‘광릉한옥집’이 최근 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불고깃집으로 출발했지만 냉면과 육개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묵직한 놋쇠그릇에 한우 우둔살로 뽑은 깊은 맛의 육수, 100% 메밀로 만든 면발 등 여러 곳에서 명가의 향기가 은근하게 풍긴다.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요즘은 겨울철에도 냉면 명가들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분명한 사실은 육수는 겨울이 되면 최상의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맑고 진하고 시원한 겨울 육수를 들이켜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