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 [스포츠동아]
‘주간동아’ 1134호(지난해 4월 18일자)에 실린 ‘베이스볼 비키니’는 이 문장으로 끝이 났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3~5번이 아니라) 2~4번 타자가 클린업 트리오가 됐으니 한국 프로야구에서 ‘타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올해 프로야구 시범경기 분위기를 보면 ‘머지않은 미래’가 올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전망입니다. 키움 히어로즈가 2번 타자로 박병호를 올렸습니다.
모든 야구팬이 이런 선택에 찬성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한 매체는 ‘기자의 눈’ 꼭지를 통해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2번 박병호는 기껏해야 (1회에) 2점 홈런을 칠 수밖에 없다. 4번이라면 만루 홈런을 칠 수 있다. 1회에 2점과 4점은 엄청난 차이다.”
30개 시뮬레이션 중 29개가 ‘박병호 2번’
그러면 실제로 4번 타자는 얼마나 자주 1회에 만루 홈런을 칠까요? 최근 3년(2016~2018년) 동안 프로야구는 총 2160 경기를 치렀고, 1회 공격은 총 4320번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4번 타자가 1회에 경기 첫 타석에 들어선 건 총 2897번(67.1%)이었고, (1회에 타자일순을 하면 두 번째 타석도 가능합니다. 단, 이때는 2번 타자에게도 만루 홈런 기회가 올 수 있으니 제외) 그 가운데 만루 상황은 54번이었습니다. 이 54번 가운데 홈런이 나온 건 3번이었습니다.그러니까 1회 만루 홈런을 노리고 어떤 타자를 4번 타순에 배치해 그게 성공할 확률은 0.069%(4320번 중 3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확률 때문에 꼭 4번 타순을 고집해야 할까요? 4번 타자는 1회 중 32.9%는 타석을 얻지 못하지만 2번 타자는 100% 1회에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 기간 4번 타자가 경기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건 181번(4.2%)이었습니다. 차라리 이 확률을 믿고 4번 타자를 2번 타순에 내보내는 게 1회에 득점을 올리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이런 비판도 있었습니다. “박병호가 출루한다고 치자. 누가 그를 홈으로 불러들일 것인가. 박병호가 4번일 때와 다른 선수(김하성)가 4번일 때의 확률을 따져보라.”
타자가 다른 선수를 홈으로 불러들이면 ‘타점’이 남고, 직접 홈플레이트를 밟은 선수에게는 ‘득점’이 남습니다. 박병호는 지난해 부상으로 113경기만 뛰고도 88득점으로 팀 내 2위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를 144경기 기준으로 환산하면 112득점이 됩니다. 112득점은 지난해 리그 3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박병호를 홈으로 불러들일 선수가 없었다면 이렇게 득점을 많이 올릴 수 없었을 겁니다. 이 매체의 걱정과 달리 키움(당시 넥센) 타선에는 박병호를 홈으로 불러들일 선수가 있던 겁니다.
그래도 ‘확률을 따져보라’고 하시니 따져봤습니다.
사실 타순 최적화는 세이버메트릭스(야구통계학) 연구 결과가 쌓이고 쌓인 분야입니다. 한국에서는 장영재 KAIST(한국과학기술원) 산업및시스템공학 교수가 ‘마르코프 체인’을 활용한 연구 결과를 내놓으면서 “타순은 확률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됐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마르코프 체인을 가지고 간단한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계산해봤습니다. 이 시뮬레이터에 최근 3년간 1~9번 타순 리그 평균 기록(출루율, 장타력)을 입력했더니 경기당 평균 5.43점을 뽑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제 이 기간 리그 평균 득점은 5.50점입니다. 이 정도면 아주 못 믿을 장난감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 시뮬레이터에 올해 첫 시범경기 때 키움에서 선발로 내세운 선수들의 지난해 기록을 넣었습니다. 그다음 어떤 순서로 타순을 짜면 득점이 제일 많이 나오는지 라인업 30개를 보여달라고 명령을 넣었습니다.
그 결과 ①이정후→②박병호→③김하성→④제리 샌즈→⑤송성문→⑥임병욱→⑦이지영→⑧김혜성→⑨서건창 순서가 제일 점수를 많이 뽑을 수 있다고 나왔습니다. 컴퓨터는 박병호가 2번을 칠 때 키움이 득점을 제일 많이 올릴 수 있다고 평가한 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라인업 30개 가운데 10위를 제외한 29개(96.7%)가 박병호 2번 카드를 선택했습니다. 10위는 박병호가 5번을 치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대신 이 30개 라인업 모두 외국인 타자 샌즈를 4번 타순에 놓아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타순별로 어울리는 타자는 따로 있다?
1월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서울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 출범식에서 선수들이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원태, 서건창, 박병호, 김하성, 이정후. [뉴시스]
1번 타자 자리에는 어떤 선수가 들어가야 할까요? 대부분 ‘날쌘돌이’를 떠올릴 겁니다. 이런 생각은 월드시리즈(1903년 시작)보다 오래됐습니다. 1898년 주간지 ‘스포팅 라이프’에 이미 “작고 활동적인 선수, 잘 치고 도루 능력이 뛰어나며, 볼넷을 얻을 때까지 끈질기게 투수를 물고 늘어질 줄 아는 타자를 관습적으로 1번에 배치한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1898년은 아직 파울을 쳐도 스트라이크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던, 안타 숫자 대비 실책이 25.9%에 이르던 시절입니다(지난해 내셔널리그 안타 대비 실책 비율은 7.1%입니다). 100년 넘는 동안 야구가 조금씩 바뀔 때도 특정 타순에 어울리는 선수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 이유로 ‘기자의 눈’은 “4번 타자에 대한 개념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장(정석) 감독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3개 팀을 월드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웨슬리 브랜치 리키 단장(1881~1965)은 1954년 ‘라이프’지에 “타점은 사람을 오해하게 할 뿐 아니라 부정직한(not only misleading but dishonest) 기록”이라면서 “이기는 팀을 만들려면 팀 내에서 출루율이 제일 높은 선수를 타순표 위에 붙여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역시 기꺼이 변화를 선택할 줄 압니다.
2016~2018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출루율이 제일 높은 선수가 붙어 있는 곳은 역시 3~5번 타순입니다. 그 결과 1번 타자(0.676점)가 아니라 2번 타자(0.720점)부터 이닝을 시작할 때 점수가 제일 많이 났습니다(그래프 참조).
그런데 1번 타자가 선두 타자로 나오는 경우는 20.8%로 제일 많은 데 비해, 2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비율은 8.7%로 꼴찌입니다. ‘강한 2번 타자’ 이론을 떠나 단지 현 타순을 한 칸씩 끌어올리기만 해도(2번→1번, 3번→2번…) 점수를 더 많이 뽑을 수 있는데 100년 묵은 고정관념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타순을 끌어올리면 타석도 늘어납니다. 최근 3년간 2번 타자는 1년 평균 677타석에 들어선 반면, 4번 타자는 647타석으로 30타석 적었습니다. 지난해 박병호는 11.3타석마다 홈런을 하나씩 날렸습니다. 30타석에 더 들어서면 홈런을 거의 3개 더 날릴 수 있습니다.
이 매체가 지적한 것처럼 “프로야구는 실험하는 곳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실험은 이미 남들이 다 끝낸 지 오래입니다. 이제 결과를 만들어봅시다. 리키 단장은 “운은 설계에서 비롯된다(Luck is the residue of design)”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박병호 2번 카드는 충분히 운이 따를 만한 근사한 설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