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앞서 국정원 간부들이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차관급에 해당하는 국정원 차장급 간부는 북한·해외파트를 관장하는 1차장과 대공·국내파트의 2차장, 기술 분야를 책임지는 3차장, 예산과 조직 문제를 관장하는 기획조정실장까지 모두 4명.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직원 가운데 원장과 이들 네 사람만이 대외적으로 신원이 공개된다. 이 가운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 조작과 관련해 물러난 서천호 전 2차장의 후임으로 지난해 5월 임명된 김수민 2차장을 빼고는 모두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4월 임명된 이들이다. 최근의 인사 논의는 2차장을 제외한 전원을 물갈이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미묘한 시점, 해킹 파문 조기 진화 성공적?
이러한 흐름은 3월 이병기 당시 원장이 갑작스레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부임한 이병호 원장의 친정체제가 비로소 완성되는 시그널로 해석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병호 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대통령선거 당시의 댓글파동과 간첩사건 증거 조작, 지난해 여름 인사파동 등으로 흉흉했던 조직 내부 분위기를 다잡고자 애썼지만, 7월 해킹 의혹이 불거지면서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특히 부임 직후부터 8월 정기인사를 통해 본부 실국장과 시도 지부장 등 1급 간부 30여 명 가운데 대다수를 교체하는 큰 폭의 조직개편을 계획했으나, 해킹 프로그램 구매 사건 여파로 5명을 바꾸는 데 그쳤다는 것. 뒤이은 2~3급 인사 역시 예고됐던 것에 비하면 소폭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킹 사건의 파도가 워낙 거셌던 만큼 과감한 변화보다 조직 안정화에 힘을 쏟으라는 ‘청와대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는 후문이다.
반면 이번 차장인사가 마무리된 후에는 통상의 정기인사 시기와 상관없이 1급 간부는 물론 중간 간부진에 이르기까지 ‘당초 생각했던 대로’ 상당한 규모의 인사 발령이 뒤이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신임 원장이 임명되면 1급 간부의 절반 이상, 정권이 바뀐 뒤에는 사실상 대부분이 교체돼왔던 그간 관례에 준하는 ‘인사태풍’이 불 수 있다는 것. 미뤄졌던 ‘이병호식(式) 국정원 만들기’ 프로젝트가 뒤늦게 가동되는 셈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같은 대규모 인사의 시점이 국정감사가 마무리된 후인 11월로 맞춰져 있었다는 점. 7월 이후 해킹 의혹에 대한 여야 공방이 이어지고 국정원 현장 검증과 관련해 합의점이 쉽게 도출되지 않으면서, 안보당국과 국회 안팎에서는 10월 국정감사가 이 사안의 마지막 고비가 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10월 20일 국정원 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여야는 해킹 의혹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로그파일 검증과 관련해 막판 진통을 겪었지만, 파일 공개나 기술적 세부조사가 무산되면서 진상규명 작업 역시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로써 국정원 수뇌부나 청와대 모두 해킹 파문 여파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10월 20일 국가정보원 핵심 간부들이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회의실에서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감사를 받고 있다. 왼쪽부터 이헌수 기획조정실장, 한기범 1차장, 이병호 원장, 김수민 2차장, 김규석 3차장.
실제로 이번 국정감사 기간 국정원 측은 이전과 달리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위상 다지기’에 나선 바 있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외국인 동조자들의 테러 시도 적발과 IS에 가담한 김모 군의 행적 추적,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건강 문제와 고모인 김경희 전 조선노동당 경공업부장의 신상, 외교안보부처와 국회에 대한 북한의 해킹 시도, 해외 주재 북한 엘리트 관료들의 망명 현황 등 민감한 이슈를 정보위원회에 보고한 게 대표적이다. 특히 이제까지 ‘엄중보안’을 강조해왔던 상당수 사안에 대해 별도의 설명자료를 만들어 외교안보부처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 10월 20일과 21일 관련 소식이 국내 언론 주요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배경이다. ‘국정원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공개 시위로 해석할 만한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국정원은 차장급은 물론, 중간 간부 인사까지 청와대 측에 명단을 사전 제출해 승인을 받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출범 후 처음이었던 남재준 원장의 4월 인사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고위공직자인 차장급에 한해서만 청와대 관련 부서에서 통상적인 검증 절차를 진행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 반면 지난해 8월 인사의 경우 이미 발령 사실이 내부에 공개된 특정부서 1급 간부를 두고 청와대 핵심에서 뒤늦게 개입하는 바람에 파문이 일었고, 그 와중에 이헌수 기획조정실장이 사의를 표명하는 등 사태가 크게 확산된 바 있다.
이 때문에 전직 안보당국 고위 관계자 상당수는 이번 인사의 경우 ‘청와대의 뜻’이 최소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지난해 인사파동이 언론에 공개되고, 특히 그 배경에 박지만-정윤회 그룹의 파워게임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워낙 내상이 컸으리라는 것(‘주간동아’ 966호 커버스토리 ‘권력 암투 진실게임’ 참조). 해킹 파문을 조기에 마무리한 노고를 치하하는 차원에서라도 이번 인사에서는 현 수뇌부의 뜻을 상당 부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취지다. 물론 뚜껑을 열기 전에는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다는 단서를 피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