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 팬서’의 한 장면(왼쪽)과 블랙팬서당의 로고. [사진 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블랙 팬서’는 슈퍼히어로의 결사체 ‘어벤져스’ 일원인 동명의 흑인 슈퍼히어로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흑표범을 뜻하는 블랙 팬서는 겉으로는 아프리카 최빈국으로 위장했지만 비브라늄이라는 강력한 금속으로 지구 최고 기술과 부를 축적한 ‘와칸다’라는 가상왕국의 왕이다. 와칸다의 젊은 국왕 티찰라(채드윅 보스만 분)는 미국에서 비밀리에 혁명가로 자란 사촌 에릭(마이클 B. 조던 분)의 도전을 받고 왕좌를 뺏긴다. 비브라늄을 지키기 위해 와칸다의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전통(부왕)과 아프리카 대륙 출신인 다른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외면해온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릭) 사이에서 번민했기 때문. 하지만 에릭이 와칸다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정복전쟁에 나서는 것을 보고 이를 막으려 한다.
미국 흑인인권운동사를 알고 있다면 티찰라와 에릭의 대립은 마틴 루서 킹 목사(1929~69)와 맬컴 X(1925~65)의 대립과 오버랩된다. 기독교도였던 킹 목사가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한 흑백화합을 추구했다면, 무슬림 사회주의자였던 맬컴 X는 백인들이 저지른 죄악을 정죄하기 위한 비타협적 흑인혁명을 촉구했다.
사실 두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은 마블의 만화로 유명한 작품은 X맨 시리즈다. 돌연변이 인간(X맨)과 일반인의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한 자비에 교수의 모델이 킹 목사라면, X맨에 의한 인류정복을 주장한 매그니토의 모델이 맬컴 X다.
문제는 블랙 팬서라는 이름이 맬컴 X의 영향 아래 탄생한 미국 급진주의 흑인인권단체 블랙팬서당(BPP)을 연상케 한다는 데 있다. BPP는 맬컴 X가 암살되고 1년 뒤인 1966년 창당됐다. 흑인 학생들을 위해 무료 아침식사를 제공하고, 불필요한 경찰 폭력에 맞서겠다며 검은 베레모를 착용하고 총기로 무장한 채 흑인 게토 지역을 순찰하면서 젊은 흑인들의 선풍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에드거 후버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국내 안보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라고 선포한 뒤 미국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을 받으며 폭력, 고문, 살인, 암살 혐의로 조직원들이 잇따라 검거된 끝에 1982년 해체됐다.
똑같이 블랙 팬서라는 이름을 쓰면서 맬컴 X의 노선을 비판해도 되는 걸까. 원작자 스탠 리에 따르면 블랙 팬서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 원래 이름은 코울 타이거(Coal Tiger·석탄 호랑이)였으나 리가 읽었던 대중모험소설 속 주인공의 조력자로 등장한 흑표범에서 영감을 얻어 블랙 팬서로 바꿨다고 한다. 블랙 팬서가 마블 코믹스 만화책에 처음 등장한 시점은 1966년 7월 발간된 ‘판타스틱 포’ 52회차였다. BPP가 창립된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0월이다.
그럼에도 블랙 팬서 제작진은 이에 대한 논란을 의식했음이 틀림없다. 영화 속 미국의 무대로 등장하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는 BPP가 처음 결성된 곳이다. 에릭과 대결에서 깨달음을 얻은 티찰라는 이곳에 대규모 흑인지원센터를 세운다. 또한 영화 속 와칸다의 모토 ‘공격받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BPP의 슬로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