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리 서밋(Archery Summit) 와인을 한 모금 머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검게 익은 체리와 진한 산딸기향,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 입안을 은은하게 맴도는 마른 허브와 삼나무향. 프랑스 최고급 피노 누아르(Pinot Noir) 와인 맛이었다. 레이블을 다시 확인했다. 아처리 서밋의 프리미어 퀴베(Premier Cuvee). 미국 오리건 주에서 만든 피노 누아르 와인이 분명했다. 품질의 비결을 묻자 와인메이커 엘레니 파파다키스(Eleni Papadakis)가 답했다.
“저희는 쉽고 편한 방법을 쓰지 않아요.”
1993년 설립된 아처리 서밋은 고품질 소량생산을 추구하는 와이너리다. 와인메이커로 잔뼈가 굵은 크리스 마자핑크(Chris Mazapink)와 엘리니 파파다키스, 30년 넘게 오리건의 포도밭을 지켜온 팀 스콧(Tim Scott)이 핵심 멤버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있지만 각자 일을 구분하지 않는다. 포도 재배부터 와인 생산, 발효조와 배럴 세척까지 모든 일을 함께 한다. 자동화는 안 했다. 모든 과정에는 ‘자연’과 ‘수작업’이라는 키워드가 존재한다.
아처리 서밋의 6개 밭은 각기 개성 넘치는 포도를 생산한다. 양조장에서도 동력을 이용해 와인을 펌핑하지 않는다. 포도가 발효조로 이동하고 와인이 배럴로 옮겨지는 모든 경로에 중력을 활용한다. 와인을 자연스럽게 다뤄 품질과 개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다. 와인 숙성은 산을 파서 만든 자연 동굴을 이용한다. 자연이 제공하는 섭씨 13~15도 온도와 75% 습도야말로 와인 숙성의 최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아처리 서밋 와인은 두 가지다. 프리미어 퀴베는 6개 밭에서 수확한 포도를 따로 발효, 숙성시킨 뒤 최상의 비율로 블렌딩해 만든 와인이다. 질감은 부드럽고 묵직하며, 향은 신선하고 상큼하다. 마시기 편하고 다양한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아르쿠스 에스테이트(Arcus Estate)는 단일 밭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아르쿠스는 라틴어로 ‘활’을 뜻하는데, 밭 모양이 활처럼 휘고 경사가 급해 붙은 이름이다. 이 밭은 위치에 따라 햇빛을 받는 시간대가 달라 다양한 맛의 포도가 생산된다. 와인도 여러 가지 베리, 버섯, 미네랄 등 복합적인 향을 품는다. 섬세하고 세련된 향미와 매끄럽고 탄탄한 질감은 음양이 완벽하게 조화된 듯한 느낌이다.
아처리 서밋은 오크통을 2단 이상 쌓지 않는다. 와인이 익는 동안 끊임없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파파다키스는 배럴마다 어느 밭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 들어 있는지 기억한다고 했다.
“배럴 하나하나에 손을 대고 와인에 귀를 기울여요. 그러면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만들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생각나요.”
그의 말에 어린 시절 매일 장독을 닦고 장맛을 살피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처리 서밋 와인이 왜 맛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정성과 손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