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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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꼭꼭 숨겨온 비밀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

밀착취재 | 60년 전 풀려난 국군포로 모임 ‘한솥회’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3-05-24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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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꼭꼭 숨겨온 비밀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

    5월 17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 모인 ‘한솥회’ 회원들.

    부처님 오신 날인 5월 17일 오후 1시. 서울 중구의 한 돼지갈비 식당에 노인 8명이 모였다. “치매 걸린 남편이 이 모임에 나오는 걸 고향 가는 것만큼 좋아해 동행했다”는 노부인도 보였다. 이들은 매달 셋째 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 회비는 1만 원. 서울, 인천, 제천, 세종 등에서 온 노인들은 과거의 설움을 잊으려고 이날만큼은 허리띠를 푼 채 배불리 먹는다.

    수치스럽고 창피한 과거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동(현 천마군 천산리) 제7포로수용소(천마포로수용소) 출신의 국군포로. 이들 대부분은 19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패한 뒤 포로가 됐고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의 포로교환원칙에 따라 귀환했다. 남한에 돌아온 국군포로 8333명 가운데 천마포로수용소 출신은 800여 명에 달한다. 당시 귀환한 천마포로수용소 국군들은 ‘한솥회’를 만들어 40여 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얼굴이 조그맣게 실리는 건 괜찮지만 이름을 공개하는 건 불명예”라며 한사코 익명을 요청한 국군포로들. 이들에겐 과연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정전 60년 만에 처음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국군포로들을 만나 그간의 삶을 물었다.

    ▼ 한솥회란 모임을 만든 이유는 뭔가.



    A : 나는 이 모임을 한솥회로 부르기 싫다. 인민군들한테 밥을 얻어먹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귀순용사회라고 해야 맞지 않나 싶다.

    B : 다수가 모임 이름을 한솥회라고 하는 데 동의했으니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전에는 끼리끼리 만났다. 그러다 국군포로 출신이 운영하는 명동 가게를 중심으로 하나둘 모였다.

    C : 강동포로수용소, 안주포로수용소에 있던 사람들도 모임에 나왔지만 천마포로수용소 출신이 대다수였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형제같이 지내자’ ‘식구처럼 한솥밥을 먹고살았던 것을 잊지 말자’며 ‘한솥회’라고 지었다. 우리는 1928~33년생으로 나이가 제각각이지만 동갑내기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나온 뒤 새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한솥회는 60년 전 돌아온 국군포로들의 유일한 모임인데, 그동안 왜 공개하지 않았나.

    A :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됐는데도 내가 포로였다는 사실이 창피하다. 나는 교사인데 혹시 학생이나 동료교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나를 무시했겠나.

    B : 미국에서는 포로가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는다지만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D : 우리는 최전선에서도 명령을 완수한 사람들이다. 사상 전향도 하지 않았다.

    E : 한 지역의 6·25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으면서도 국군포로였다는 것을 공개할 수 없었다. 포로란 사실을 드러내면 연금을 더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해로운 점이 많지 않았을까.

    F : 우리 세대는 일본 군국주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결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한 번은 친구 아버지를 찾아가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당신 아들과 함께 생활했다”며 소식을 전해준 적이 있는데 그다음에 찾아가니 피하더라. 하물며 아들이 북에 있는 사람도 저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싶어 이후 누구에게도 국군포로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 군 입대는 언제 했나. 언제 포로가 된 건가.

    C : 1950년 12월 16일 중학교 6학년(고교 3학년) 때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입대했다. 화물차를 타고 일주일 동안 달려 도착한 곳이 부산진훈련소였다. 대구에서 입대한 뒤 전진하다 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B : 중학교 4학년(고교 1학년) 때 병역의무가 없는데도 영장이 나와 1950년 12월 30일 입대했다. 서울에서 집합한 뒤 12일 동안 걸어가 대구에서 군인이 된 것이다. 이후 하사관학교에서 9주 동안 훈련받고 일선으로 나간 지 한 달도 안 돼 현리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D : 나는 이북에서 넘어와 서북청년회에 들어갔다 1948년 5월 27일 입대했다. 그 뒤 국군창설요원으로 전투에 임했다가 51년 5월 17일 설악산전투에서 국군포로가 됐다.

    E : 1947년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뒤 국군으로 싸우다 51년 11월 동두천에서 포로가 됐다.

    2년 동안 수많은 사람 죽어나가

    ▼ 포로 생활 가운데 기억나는 점을 얘기해달라.

    A : 강동포로수용소, 철산 모나즈석 광산을 거쳐 천마수용소로 갔다. 벌목이 주 업무였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정치학습, 정치토론을 해야 했다. 교육내용이 세뇌됐는지 아닌지를 심사하는 게 가장 무서웠다. 불만이 많은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혀 수용소 내 영창으로 보내졌다.

    B : 천마포로수용소에 가기 전 철산 모나즈석 광산에서 일했다. 당시 막사가 너무 추웠다. 30명이 나란히 붙어 잤지만 새벽 2시면 하나씩 잠에서 깼다. 한 사람이 일어나면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잠이 달아났다. 이질이 유행해 화장실에 가다 변을 보기도 했다.

    C : 나는 산에 가서 나물을 캐야 했는데 실적이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연발하다 보니 자포자기했다. 그때 기억 때문인지 남한에 돌아와서도 나 스스로가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D : 옷이 없어 2년 동안 갈아입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니까 몸이 파랗게 되면서 이가 기어 나오더라. 그 시체를 변소에 옮겨 이를 털던 기억이 난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밥 한 끼가 옥수수 13알이었다. 배고파서 쥐까지 먹었다. 독초를 먹고 죽은 사람도 있다. 영양 부족으로 야맹증에 걸려 밤이 되면 잘 보이지 않았다. 70%가 굶어죽었다.

    A : 내 추측으론 40%가 죽은 것 같다. 5개 중대가 있었는데 그중 5중대는 환자중대였다. 그곳에 가면 거의 다 죽어서 나왔다. 나도 5중대에 두 번이나 갔지만 다행히 살아나왔다. 해빙기마다 열병이 돌았다. 군의관 출신 포로들이 인플루엔자라고 했는데 아마도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어져 열감기로 사망한 것 같다.

    D : 가까운 사람을 감시하는 일이 힘들었다. 천마포로수용소에 갔더니 군대 후임 2명이 찾아와선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며 사라지더라.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내 뒷조사를 하라는 지령을 받았던 것이다. 심지어 나도 그 두 사람을 감시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 포로 교환 대상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나.

    A : 이북 출신, 공산주의자를 제외하면 남한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부정한 반동분자는 갈 수 없었다. 가족 때문에 남한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보내준 반면, 남한 체제가 좋아서 가겠다는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혀 나오지 못했다. 나만 해도 고향이 황해도인데 가호적이 서울인 덕에 나올 수 있었다. 서울 말씨로 말해 심사관을 속였다.

    D : 진짜 고향은 황해도다. 하지만 고향이 만주고 숙청당한 후 이북에서 살아 이북 말투를 쓴다고 둘러댔다. 빈농 출신을 우대했지만, 나는 정미소를 운영한 중농이라고 말했다. 그럴듯하게 말해야 솔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 같았다. 이런 신상조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했다.

    F : 누군가를 밀고하거나 상사를 하대해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를 택한 사람도 있었다.

    ▼ 남한에 돌아와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F : 나는 야뇨증, 야매증이 심해 고생했다. 군속으로 있다 포로 생활을 2년여 했지만,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복무를 해야 했다. 내 젊음이 아까웠다.

    A : 악몽에 시달린다. 지금도 그때 꿈을 꾼다. 불안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곳에 가는 바람에 육체적 발육이 멈춰 후유증이 심했다. 사실 그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어 힘들었다. 이북에서 사상교육을 받았을 거라고 의심받을 게 뻔했다.

    G : 사실, 그때 “김일성 만세!”를 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B : 병적을 조회하면 입대, 제대 기록만 나온다. 그 밖에 포로 기록 등은 없다. 만약 기록에 남았더라면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사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그나마 정착을 잘한 경우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생활이 어려워 모임에도 나오지 못한다.

    D : 젊을 때는 1년이란 시간이 소중하지 않나. 그런데 2년여 동안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니 다른 청년들처럼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사회에 적응할 때 나라로부터 받은 도움이 전혀 없다. 하긴 이북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송환할 능력도 없는 정부 아닌가.

    절대 용감하게 싸우지 마라

    “평생 꼭꼭 숨겨온 비밀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

    1953년 정전협정을 계기로 돌아온 국군포로를 반기는 모습.

    ▼ 정부에 바라는 점은 뭔가.

    F : 그때 국군포로가 어디에 묻혔는지 잘 안다. 수용소 뒤편에 무더기로 묻었다. 나중에 가짜로 팻말을 붙였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군포로 시신을 발굴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 증언이라도 채록해라. 어느 누구도 국군포로 경험에 귀 기울이지 않아 아쉽다.

    B : 국회에서 ‘6·25 소년병 지원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는데 계류 중이다. 군대에 갈 나이가 아닌데도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상해줘야 한다.

    C : 우리가 정부에 뭘 해달라고 말하기보다 나라에서 먼저 우리를 생각해주는 게 맞지 않나. 우리는 매달 6·25 참전용사수당을 중앙정부로부터 15만 원, 지방자치단체로부터 3만~5만 원을 받는데, 국군포로가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이 매달 19만 원뿐이라면 너무 싸지(적지) 않나.

    D : 얼마 전 군대에 가는 손자에게 “절대 용감하게 하지 말고 피할 건 피하고 절대 잘난 체하지 마라”고 했다. 나만 해도 열심히 싸우다 국군포로가 됐지만 전사 처리가 되는 바람에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국군포로 출신에 대한 대우가 이렇다면 누가 전쟁에 나서겠나.

    E :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없어진 사람이 많았다. 반동분자로 찍혀 남한에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가 의외로 많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런 국군포로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80세 넘은 국군포로들이 죽기 전 돌아올 수 있게 정부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의 전쟁 포로 정책

    귀환 포로 의료 지원 철저, 유해 끝까지 발굴


    “평생 꼭꼭 숨겨온 비밀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

    미국 포로실종자확인합동사령부(JAPC) 대원들이 6·25전쟁 실종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포로는 종전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돼야 한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 내용이다. 하지만 ‘포로 송환’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숙제를 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매년 9월 셋째 금요일을 ‘포로 실종자의 날’로 정해 포로에 대한 국가 책임을 상기할 뿐 아니라, 그들을 찾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인이 베트남전 관련 포로 및 실종자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해 포로 구술자료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미 보훈부 통계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부터 소말리아전쟁까지 발생한 미군 포로의 규모는 여군 85명을 포함해 14만2000여 명이다.

    미군에서 포로 구조를 담당하는 핵심부서는 국방부 포로실종국(DPMO)이다. 포로실종국은 국방부 정책을 조율할 뿐 아니라 보훈부, 국무부 등 다른 부처와의 협조 업무를 총괄한다. 포로실종국에는 회수과, 통계과, 전략 및 기획과, 연구 및 분석과, 합동위원회지원실, 대외협력과가 있다. 회수과는 포로와 실종자 확인 및 귀환 업무를 담당하면서 유관기관과의 협조를 조정하고, 연구 및 분석과는 미국 문서보존청뿐 아니라 러시아, 베트남 등 관련 국가의 문서 수집과 정리, 구술기록 정리 등을 통해 포로를 추적한다. 또한 포로실종국 내 합동위원회지원실(JDSD)은 미·러포로실종자합동위원회에 연구, 분석, 행정적 지원을 한다. 포로실종국은 베트남전, 6·25전쟁 실종자 가족을 초청해 연례 브리핑 행사도 진행한다.

    한편 포로실종국 활동을 지원해주는 대표 기구는 포로실종자확인합동사령부(JPAC)다. 이곳은 포로실종국의 조사 연구 성과를 반영해 포로가 된 생존자를 귀환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실종자의 신원 확인, 발굴, 회수 임무를 담당한다. 이 사령부의 모토는 ‘그들이 모두 귀환할 때까지(Until they are home)’다. 사령부는 2008~2009년 135곳 이상을 발굴 조사해 실종자 170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 사령부 홈페이지에는 영어, 베트남어, 러시아어, 중국어, 한국어 등으로 된 현장 제보 양식이 있다.

    포로실종자확인합동사령부에서는 전문가 집단, 육·해·공군, 해병대 등에서 선발한 군인과 공무원 등 약 400명이 일한다. 해외 조사와 발굴작업을 위해 태국 방콕, 베트남 하노이, 라오스 비엔티안 등 3곳에 파견대를 상주시키고, 파견대가 배치되지 않은 곳을 발굴하기 위한 제4파견대가 진주만에 있다. 또한 전문가 10여 명으로 구성한 18개 발굴팀이 있다. 세계적 규모의 중앙신원확인실과 육군유전자감식실도 운영한다.

    한편 포로 문제에 대해 포로 가족뿐 아니라 재향군인회도 함께 나선다. 재향군인회, 외국전쟁참전자협회, 베트남참전전우회, 한국전참전전우회 등은 포로와 실종자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포로와 실종자 관련 정보의 해제를 요구하며, 다른 나라 재향군인회와 협력을 맺어 미국 정부 및 의회의 포로 실종자 추적 노력을 지원한다.

    또한 1981년 포로구급법에 따라 미 보훈부에 설치한 포로자문위원회에는 국군포로들이 참가한다. 보훈장관에게 포로의 장애 및 질병과 관련된 보상금, 재활 등의 보훈행정에 대한 자문과 권고를 하는 이 위원회는 국군포로 외에 심리학, 정신의학, 노인의학 전문가로 구성된다.

    이러한 노력이 더해진 결과, 미 국군포로 가족은 기본주택수당, 가족별거수당 등 각종 수당을 포함한 급여를 포로 귀환 때(사망 확증, 법원의 사망판정 전)까지 계속 지급받는다. 포로 기간 중 사망한 것으로 판명되면 급여와 수당 지급이 중단되며, 전사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미귀환 포로의 유해 송환 시 대우도 전사자와 같다. 포로가 전쟁 중 사망하면 그 배우자, 18세 이하 자녀, 부양 부모는 매달 부양 및 보상 수당을 받는다. 그 수당은 배우자의 경우 재혼하면 중단되지만 이혼하거나 새 남편이 사망하면 다시 지급된다.

    미국 정부가 포로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1881년 제정된 ‘전 포로구급법’에 따라 포로 기간 중 입은 부상과 심리적 장애에 따른 치료를 해준다. 그 결과 생존 포로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부상, 질병 등으로 장애 보상을 받는다. 정신질환,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발작, 심장병 등 하나 이상의 질환으로 10% 장애로 진단되면 보훈부에서 포로 경험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해 의료혜택을 준다. 30일 이상 억류자로 비타민결핍증, 만성적 이질, 장 연충병, 각기병, 간경변증 등이 나타나도 복무와 관련한 질환으로 보고 치료를 지원한다. 90일 이상 억류된 포로는 치과진료 대상자가 된다. 또한 귀환 포로들은 주차료 면제, 세금 감면 같은 혜택을 받는다.

    참고자료 |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주요 국가 전쟁 포로 정책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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