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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리뷰

‘신화’를 ‘비극’으로 전환시킨 걸작의 탄생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영화 ‘조커’의 진가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신화’를 ‘비극’으로 전환시킨 걸작의 탄생

[사진 제공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제공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에서 최고의 장면은 조커가 고담시 뒷골목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춤추는 모습이다. 포스트를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김흥국이 ‘호랑나비’를 부르며 춤추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영화를 아직 못 본 상태였지만 정곡을 찔렀다. “인생은 본래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경구를 단숨에 간파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저 장면에서 숨을 멈추게 된다.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도 많다. 타이틀 롤인 조커 역을 맡아 필생의 연기를 펼쳤다는 찬사를 받은 호아킨 피닉스가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영원한 악당 조커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을 담아냈기 때문이다(이하 강력한 스포일러 포함).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자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이 돋보인 
영화 ‘조커’. [사진 제공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이 돋보인 영화 ‘조커’. [사진 제공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산동네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코미디언을 꿈꾸는 소심한 중년 남성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 아서의 꿈은 “항상 웃는 아이가 돼라”며 그를 ‘해피(Happy)’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엄마 페니 플렉(프랜시스 콘로이 분)이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꿈과 현실은 어긋나도 아주 크게 어긋나 있다. 

남들에게 웃음 주기를 원하지만 정작 그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다. 심지어 사소한 일에 웃음이 한번 터지면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남을 웃겨야 할 코미디언이 정작 자신이 먼저 웃음을 터뜨리면 보는 사람은 대부분 웃음을 강요한다며 불쾌감을 느끼기 마련. 그래서 그는 호구지책으로 광대 분장을 한 길거리 호객꾼으로 살아간다. 

시작부터 비극적이다. 하지만 토드 필립스 감독은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문 앞에 써 있다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니’라는 경구를 따와 에누리 없이 극화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아서에겐 불운이 파도처럼 덮친다. 복지예산 삭감으로 무료 정신과 진료가 끊긴다. 우연히 손에 넣은 권총을 잘못 관리해 직장에서도 잘린다. 망연자실한 채 광대 분장으로 귀가하다 젊은 여성을 희롱하는 치한 셋으로부터 린치를 당하고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다. 



그렇게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우연히 엄마의 편지를 읽다 고담(Gotham)시 최고 부자인 토머스 웨인(훗날 배트맨이 되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브렛 컬런 분)이 자신의 생부라는 대목을 발견한다. 한 줄기 서광이 비추나 싶었으나 뼛속까지 시린 진실의 덫에 걸리고 만다. 믿고 싶지 않은 출생의 비밀, 아니 그 저주에 몸부림치다 이웃집 싱글맘과 남다른 사랑 역시 자신의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추락하다 바닥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바닥이 열리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아서가 ‘정신적 아버지’라고 믿었던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 분)이 아서의 스탠딩 코미디 동영상을 보고 방송 도중 조롱을 퍼부은 것. 생부라 믿었던 이와 의부라 믿었던 이, 심지어 생모라 믿었던 이로부터도 버림받은 아서에게 쥐어진 것은 권총 한 자루뿐이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물을 흘리는 조커를 그대로 내면화한 캐릭터 같던 아서는 점차 그 눈물이 말라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광대 분장을 한 지하철 살인범을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응징한 영웅으로 떠받드는 일단의 군중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울리고 머레이쇼 출연 제안이 들어온다. 

꿈에 그리던 방송 출연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낼 덫임을 아서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할 광대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광대라며 조리돌림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 없는 슈피히어로 영화

아서의 선택은 광대의 죽음이었다. 방송에 출연해 생방송 도중 카메라 앞에서 권총 자살하는 것. 코미디언으로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친 세상을 향해 진짜 썰렁한 농담을 건네겠다는 결심이다. 

그리고 진짜 공들여 광대 분장을 하고 집 앞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아서와 조커는 혼연일체가 된다. 그 순간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하듯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몸도 마음도 조커가 돼 날아오른다. 마치 한 마리 호랑나비가 된 듯이. 

그러나 관객은 반대로 숨이 막힌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데, 날개 없이도 현기증 나는 추락이 가능함을 목도한 관객에게 이 장면이야말로 순도 100%의 악이 탄생하는 순간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서 안에서 움튼 악은 자유낙하 운동을 펼친다. 머레이쇼에 출연한 그는 원 계획과 전혀 다른 결말을 선택함으로써 고담시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고, 어린 브루스 웨인에게도 평생 잊히지 않을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의 스핀오프(파생영화)다.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당 중에서도 독보적 존재감을 과시해온 조커에 대한 ‘악의 연대기’다. 그런데 그 어떤 슈퍼히어로 영화도 못 해낸 걸 이 영화는 해냈다. 슈퍼히어로가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 

영화에 조커는 나오지만 정작 배트맨은 등장하지 않는다. 훗날 배트맨이 될 브루스 웨인이 꼬마로 두어 번 잠시 등장할 뿐이다. 슈퍼히어로 하면 떠오르는 스펙터클한 액션 장면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전통 히어로 영화 팬이나 액션영화 팬에겐 지루할 수도 있다.


형 리버 피닉스를 넘어선 동생

2019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조커’의 장면들. [사진 제공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2019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조커’의 장면들. [사진 제공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하지만 일단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을 위해 23kg이나 감량했다는 호아킨 피닉스의 흡인력 넘치는 심리 연기와 몸 연기 때문이다. 웃으면서도 울고 있는 이율배반적 표정 연기만큼이나 내향적인 외로움과 외향적인 반항심을 함께 담아낸, 잔뜩 웅크린 몸의 연기 또한 감탄스럽다. 

계단에서 연기가 그토록 경탄을 불러일으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꼽추 악당으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연상케 할 정도로 수축된 몸의 연기를 펼치다 바로 이 장면에서 한껏 몸을 이완시켰기 때문이다. 요절한 형 리버 피닉스의 명성에 짓눌려 꽃 시절 한번 누려보지 못하다 이번 작품을 통해 진짜 연기의 맛을 깨달은 그의 ‘무화과 연기 인생’과도 공명한다. 

그에 걸맞게 묵직한 현악이 깔리는 배경음악과 좁은 공간에 밀착시킨 카메라로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린 토드 필립스 감독의 발군의 연출력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에도 잠시 등장하는 찰리 채플린 주연의 ‘모던 타임스’ 주제곡에 가사를 붙인 냇 킹 콜의 원곡이 아닌, 딱딱 끊어지는 거친 발음으로 노래한 코미디언 겸 재즈가수 지미 듀랜티의 ‘스마일’을 삽입한 것 역시 신의 한 수였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펄프픽션에 불과하던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 어떻게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가 그리스 신화에 해당한다면 ‘조커’는 그리스 비극에 필적할 깊이와 여운을 갖췄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이 DC코믹스가 됐건, 마블코믹스가 됐건 슈퍼히어로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닮았다. 인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지만 동시에 너무도 인간적 감정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쏟아진 그리스 비극은 그 신화적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바꿨다.


슈퍼히어로계 오이디푸스

그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보자. 신들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지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테베의 왕이 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 신들의 예언이 실현되고 ‘지상에서 가장 더러운 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승리를 안겨다주는 존재가 아니라 신들이 설치한 덫이었음이 밝혀진다. 신들의 계획대로라면 오이디푸스는 그 오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야 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 부당함을 고발하고자 자신의 두 눈을 뽑은 채 살아남아 전설이 된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는 여러모로 오이디푸스를 닮았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자, 그 금단의 비밀을 알고 난 뒤 아비와 어미에 해당하는 자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자,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천하의 악당(빌런)이 되도록 운명 지어진 자. 심지어 부성애에 목마른 마마보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가 명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화신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조커가 되기 전까지 아서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1%의 슈퍼리치가 점점 슈퍼히어로가 돼가는 세상에서 그렇지 못한 99% 가운데 과연 아서가 겪어야 했던 좌절과 절망, 고통을 겪고도 그처럼 주화입마(走火入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한 명의 슈퍼히어로로는 감당할 수 없어 ‘어벤져스’나 ‘저스티스 리그’ 같은 슈퍼히어로 공동체(만신전)까지 등장해도 인간 세상의 고통과 번뇌는 끊이지 않는다. 영화 ‘조커’는 슈퍼히어로의 운명을 타고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서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희 눈에는 나 같은 인생이 한낱 조크로만 보이니?”






주간동아 2019.10.11 1209호 (p48~5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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