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4

2015.09.07

효자에서 시한폭탄까지 프로야구 용병이 뭐기에

외국인 선수 체력, 기술, 장비 등 선진기법 전수…자유분방, 안하무인은 구단도 골치

  • 이경호 스포츠동아 기자 rushlkh@naver.com

    입력2015-09-07 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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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에서 시한폭탄까지 프로야구 용병이 뭐기에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투수 에스밀 로저스는 KBO 리그 데뷔 후 압도적 피칭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경기 전 타자들을 제쳐두고 타격 훈련을 하는 등 상식 밖의 기이한 언행을 하면서 그에 대한 불편한 시선들이 생기고 있다.

    프로야구가 국내 스포츠 가운데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는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확고한 지역연고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지만 영남 혹은 호남 출신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롯데 자이언츠나 KIA 타이거즈를 응원한 젊은 팬들은 지금도 잠실야구장 3루 관중석에서 원정 팀을 열심히 응원한다. ‘모태 응원팀’이란 말이 존재할 정도로 확실히 뿌리내린 지역연고제는 다른 스포츠 종목이 갖지 못한 힘이다. 다른 하나는 국내 프로 스포츠 중 유일하게 세계 정상권 실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마이너리그 더블A 수준이라 평가됐고 일본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한국 야구에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2000년대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이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연이어 4강과 준우승을 달성하고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저력에는 오랜 기간 한국 야구에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전수한 재일동포와 외국인 선수들의 공이 있었다.

    체계적인 근력 강화 훈련

    김영덕 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 감독, 김성근 한화 감독 등 재일교포 1세대 야구인은 1970년대 실업야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일본 리그 통산 91승 장명부와 80승에 빛난 김일융 등 정상급 선수들이 한국 야구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들이 구사한 새로운 변화구와 경기운영 방식은 그대로 한국 선수들에게 전수됐다.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 재일동포들은 리그가 정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제 한국 프로야구가 발전해 일본에서 정상급 선수가 아니면 국내에서도 큰 활약이 어려워지자 자연스럽게 그 수가 줄어들었다.



    1998년 프로야구는 외국인선수제도를 도입했다.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가 지명한 타이론 우즈는 메이저리그 경력이 전무한 무명 선수였다. 그러나 몸 쪽 공을 공략하는 강인한 손목 힘과 스윙 궤도로 그는 국내 야구에 큰 충격을 줬다. 외국인선수제도 도입 후 가장 달라진 문화는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자비까지 들여가며 웨이트트레이닝과 전문적인 근력 강화 훈련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투수는 좀 뚱뚱하고 배도 나와야 좋다’는 문화가 남아 있던 시기였다. 90년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가 열심히 근력운동을 하자 “투수 몸은 딱딱해지면 끝”이라고 경고하는 야구인이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외국인 선수들이 직접 눈앞에서 보여준 근력 효과는 전혀 달랐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타격왕에 오르며 정상급 선수였던 훌리오 프랑코는 2000년 딱 한 시즌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다. 거액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 내 계약 문제로 잠시 한국에 와 매우 많은 것을 남겼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인상적인 활약을 이어가기도 했다.

    당시 삼성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 kt 위즈 감독은 프랑코의 철저한 프로 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에 한국에 왔는데도 체력은 오히려 20대 선수보다 좋았다. 그때는 경기가 끝나면 서로 집에 가기 바빴는데 프랑코는 달랐다. 회복 및 보강훈련을 해야 한다며 오랜 시간 홀로 남아 근력운동을 하고 돌아갔다. 담배 피우는 선수들을 보면 달려가서 ‘프로 생활 오래 못 한다. 당장 끊어라’고 야단치기도 했다. 프로 정신이 대단했다. 단 한 시즌이었지만 삼성이 2000년대 이후 최강 팀으로 올라서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현역 시절 삼성 주장으로 프랑코와 함께했던 김기태 KIA 감독은 “메이저리그 출신 선수로 기품이 있었다. 정장을 입고 야구장에 출근하기도 했고 팬들과 미디어, 구단 직원들을 대할 때도 매우 정중했다. 프로 선수가 갖춰야 할 자세 등이 매우 인상 깊었다. 다른 외국인 선수도 팀 분위기와 다른 행동을 할 때면 용납하지 않고 크게 야단쳤다. 경력이 워낙 대단한 선수여서 자유분망한 외국인 선수들도 꼼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효자에서 시한폭탄까지 프로야구 용병이 뭐기에

    2000년 42세 때 삼성 라이온즈에서 맹타를 휘둘렀던 훌리오 프랑코.

    기술적인 측면에서 외국인선수제도 도입 이후 국내 선수들은 큰 발전을 이뤘다. LA 다저스 류현진의 주무기인 서클체인지업 등 변화구는 과거 국내에선 볼 수 없었지만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 투수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했다.

    타격도 마찬가지였다. 홈런왕 출신인 장종훈 롯데 타격코치는 “예전에는 프로 선수라면 무조건 1kg 방망이를 쓰는 시대였다. 가벼운 방망이를 쓰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인 선수들은 달랐다. 배트 무게가 아닌 스윙 스피드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며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후 외국인 선수들을 통해 다양한 장비가 들어왔다. 가볍고 단단한 단풍나무 배트 등 많은 것이 타격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과거 20홈런이면 홈런 1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외국인선수제도 도입 이후 장비, 기술, 그리고 선수 체격 측면에서 변화가 이뤄졌고 40홈런, 50홈런을 치는 타자가 등장했다.

    외국인 선수들의 긍정적인 영향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2009년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100타점을 기록한 로베르토 페타지니는 2008년 경기 도중 손가락 골절을 당했다. 그러나 “내 연봉 값은 해야 한다”며 붕대를 감고 계속 경기를 뛰는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화의 시한폭탄

    외국인 선수들이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몇몇 선수는 금지약물 복용 의혹을 받았다. 한국 프로야구는 미국과 달리 약물 청정 리그를 지키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 구단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이다. 지금도 외국인 선수들은 집중적인 도핑을 거치고 있다.

    1999년 한화 우승의 주역 댄 로마이어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그 이상 오만했고 팀 내 분위기를 망쳤다. 한국 야구를 깔보는 발언을 수차례 해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롯데에서 활약한 펠릭스 호세 역시 로마이어 이상 거만했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야유를 보내고 오물을 투척한 관중석에 방망이를 집어 던지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 2001년 삼성 에이스로 활약한 발비노 갈베스는 뒷돈을 요구하고 도미니카로 돌아가버린 후 귀국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삼성의 애간장을 태웠다.

    한화 외국인 투수 에스밀 로저스는 8월 6일 데뷔전을 치렀다. 5경기에서 2번 완봉을 포함해 3차례 완투승을 거두며 돌풍을 일으켰다. 한화 팬들은 열광했고 일부에선 한국 최고 투수 선동열의 현역시절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저스는 경기 전 타자들을 제쳐놓고 타격 훈련하는 모습을 자랑하는 등 상식 이하 행동으로 분란을 일으켰다.

    많은 선수와 코치가 “미국 소속 팀이던 뉴욕 양키스라면 로저스가 그런 행동을 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평소 선수들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이 로저스의 별난 행동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부호가 따랐다.

    로저스는 8월 27일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터뜨린 후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치열한 5위 경쟁을 하고 있는 한화가 최고 에이스를 전력에서 제외하자 ‘터질 것이 터졌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동안 언론 인터뷰를 거절한 김성근 감독은 9월 1일 “왜 로저스가 그런 행동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며 로저스가 그 같은 행동을 한 원인이 심판 판정이었음을 환기했을 뿐, 그로 인한 파장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여전히 로저스는 한화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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