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0

2014.06.02

연금 저수지로 계속 흘러드는 돈

고령화로 ‘자산시장 연금화’ 급속 진행…주식시장서 기관투자자 입김 더 세져

  • 이상건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상무 sg.lee@miraeasset.com

    입력2014-06-02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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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 저수지로 계속 흘러드는 돈
    돈의 흐름은 자주 물줄기에 비유된다. 물줄기는 조용한 듯하지만 수면 저 아래에선 거칠고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거센 물결로 변하기도 한다. 흐름의 미세한 변화는 시간의 더께가 쌓이면서 물길을 바꿔놓기도 한다. 돈, 즉 자금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다. 금융위기 같은 폭우가 쏟아지면 급격히 자금 흐름이 변하기도 하고, 돈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면서 자산시장 모습을 바꿔놓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자금시장에선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계자산에서 보험과 연금 비중이 처음으로 정기예금을 넘어선 것이다(2013년 3~4분기 중 자금순환 잠정치·한국은행). 반면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정기예금은 2013년부터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5~6년간 투자자들의 자금을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였던 주식형 펀드도 크게 줄었다. 오히려 주가지수가 2000포인트대에 진입할 때마다 환매가 이뤄지며 주가 상승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예금과 펀드로는 잘 가지 않지만 계속해서 소리 소문 없이 돈이 모이는 곳이 있다. 바로 연금 관련 자산이다. 연금 형태 자산은 대부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증가하는 모습이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주택연금, 연금저축, 개인연금 등 공·사적 연금자산 모두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다. ‘자산시장 연금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자산시장 연금화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띤다. 먼저 연금 형태로 축적되는 자산이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그동안 모아놓은 자산을 연금화하는 것이다. 금융상품에선 즉시연금이나 월지급식 펀드, 부동산에선 주택연금이 여기에 포함된다.

    개인 자산운용 방식 급변 가능성



    자산시장 연금화가 진척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인구구조 때문이다. 고령화와 퇴직자 증가가 자산시장 연금화를 촉진한다. 고령화는 연금 자산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퇴직자 양산은 기존 자산의 연금화를 낳는다. 우리나라는 인구구조상 고령화가 심화하고 퇴직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55세 이상 인구를 보면 이런 현실을 가늠할 수 있다. 55세 이상 인구는 2010년 1050만 명에서 2020년과 2030년 각각 1620만 명, 2100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증가 속도도 빠르고 규모도 크다(표 참조).

    자산시장 연금화가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생각해봐야 할 투자와 자산운용 아이디어를 살펴보자. 먼저 개인의 자산운용 방식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은 집(주택)을 중심으로 자산운용을 해왔다. 재테크의 일차적 목표를 주택 마련에 두고, 주식이나 예·적금 등은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하위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연금 중심으로 자산이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산 축적기와 인출기 모두에 해당한다.

    연금 저수지로 계속 흘러드는 돈

    서울 한 증권사에서 연금 관련 금융상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직장인.

    먼저 축적기를 보자. 자산을 축적하려면 저축할 돈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사상 최고치의 가계부채와 양극화로 개인의 저축 여력은 힘겨운 상황이다. 우리나라 가계 저축률은 3.4%로 소비로 먹고산다는 미국(4.2%)보다 낮다(2012년 기준).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 퇴직연금 같은 강제적 저축이 가능한 연금자산이 노후 생활비 재원으로서 갖는 구실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세액 공제라는 세제 인센티브가 있는 연금저축계좌 같은 개인연금 상품의 매력도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퇴직 등으로 모아놓은 자산을 생활비 재원으로 써야 하는 사람도 자산을 연금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부터는 진지하게 장수 리스크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수 리스크는 인간 수명과 관계된 것으로 오래 살수록 커진다. 장수 리스크에 대한 대비는 종신형 자산으로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자산배분이론에선 주식과 부동산, 채권 같은 자산배분을 주요 논점으로 삼았지만 인출기에는 종신형 자산과 그 외 투자자산의 자산배분이 선행돼야 한다. 다시 말해 수익 중심의 축적기와 달리 현금 흐름 중심의 자산배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금 저수지로 계속 흘러드는 돈
    금리 하락 압력 요인으로 작용

    자산시장 연금화는 당연한 얘기지만 개인뿐 아니라 시장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으로 금리에는 하락 압력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연금자산이 증가하면 채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연금은 그 특성상 위험자산 비중을 너무 높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해외투자와 주식자산 비중을 늘리는 게 추세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비중은 채권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채권에 대한 수요는 금리 상승을 제어하는 구실을 한다. 물론 금리가 채권에 대한 수요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자산시장 연금화가 심화할수록 금리는 오르기 쉽지 않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자산시장 연금화는 장기적인 투자자산의 증가와 기관화로 이어진다.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뿐 아니라 개인이 가입하는 퇴직연금, 변액연금, 즉시연금 등 모든 연금은 결국 기관투자자에게 들어가는 돈이다. 이렇게 연금자산으로 들어온 돈은 공격적으로 운용하기보단 더 안정적인 중위험·중수익 형태로 운용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주식시장에서 배당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현상이나 롱숏 펀드(매수를 뜻하는 long과 매도를 뜻하는 short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는 펀드) 같은 절대수익형 상품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흐름과 관련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해, 개인투자자가 직접 주식투자로 돈을 벌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기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자금이 장기화할수록 시장이 기관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실제 최근 몇 년간 개인투자자의 성적표는 매우 좋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현재 전개되는 자산시장 연금화는 인구구조상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자산시장 연금화로 바뀌는 돈 줄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는 것은 자산운용에서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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