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0

2014.06.02

황태자…소통령…친구…달콤 쌉쌀한 그들의 권력

역대 정권 ‘2인자’ 대통령 곁에서 막후정치와 무소불위 힘 행사

  • 이영훈 동아일보 기자·‘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저자 leejin97@donga.com

    입력2014-06-02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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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태자…소통령…친구…달콤 쌉쌀한 그들의 권력

    권력자와 2인자들.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기붕,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충복’ 장세동(왼쪽부터).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최고 권력자 곁에는 늘 2인자가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조직상 2인자인 총리 외에도 자신의 복심을 통해 막후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 곁에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던 2인자의 삶과 정치를 조명해본다.

    # 이승만에 아들까지 내준 이기붕

    1960년 4·19혁명으로 비극적 말로를 맞은 이기붕은 장남 강석을 이승만에게 양자로 내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인물이다. 윤치영의 비서, 서울시장을 지냈던 그는 이승만의 지시로 창당 작업에 착수해 이범석과 자유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청산리전투 영웅’인 이범석 세력을 두려워한 그는 족청(族靑·조선민족청년단) 세력을 축출한다. 이후 그의 집이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며 자유당 정권 ‘2인자’로 군림하게 된다.

    자유당 정권 내내 권세를 누리던 이기붕은 노쇠한 이승만의 뒤를 이으려고 1956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장면에게 패한다. 이어 4년간 와신상담한 끝에 출마한 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하지만 이 선거는 새로운 권력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 되고 말았다.

    # 박정희 정권의 ‘영원한 2인자’ 김종필



    박정희의 5·16쿠데타 동지이자 처조카인 김종필(JP)은 쿠데타 성공 후 초대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의장 등을 지내며 정권 ‘2인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1969년 ‘3선 개헌’을 계기로 권력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박정희는 김종필이 유력 후계자로 부상하자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5년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겉으로는 2인자 타이틀을 달고 있었으나 권력 핵심에선 완전히 제외됐다.

    1979년 박정희 서거 후 ‘서울의 봄’ 정국에서 김종필은 한때 김영삼, 김대중(DJ)과 더불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으나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된다. 97년 DJP연합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으나 2004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이 참패해 정계를 떠난다.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며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전두환의 ‘충복’ 장세동

    전두환 정권의 2인자로 노태우를 꼽는 이도 있지만 사실상 2인자는 단연 장세동이라 볼 수 있다. 그는 1966년 베트남전쟁에 파병됐다가 전두환을 만나 충복이 된다. 12·12사태 때는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참여했다. 5공화국 출범 이후 6년간 대통령경호실장을 거쳐 안기부장으로 재직한 그는 ‘5공 청산’ 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주목받았다. 93년에는 ‘용팔이 사건’(별명이 용팔이였던 김용남이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한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5공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말해 다시 한 번 전두환의 충복임을 입증했다.

    황태자…소통령…친구…달콤 쌉쌀한 그들의 권력

    노태우 전 대통령과 박철언(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아들 김현철(오른쪽), 김대중 전 대통령과 권노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왼쪽부터).

    #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 박철언

    노태우 부인 김옥숙의 고종사촌 동생인 박철언은 노태우 정권을 만든 일등공신 중 한 명이다. 그는 5공화국 시절 안기부장 특보로 있으면서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에게 정국 전반에 관한 주요 정보를 제공하며 대권 도전을 도왔다.

    1987년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동원해 노태우 당선에 기여한 박철언은 6공화국 출범 후 여당 실세로 자리 잡는다. 그는 청와대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측근들은 그를 ‘LP’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리틀 박’이라는 의미와 함께 ‘리틀 프레지던트’라는 뜻으로도 통했다. 김영삼과의 후계자 대결에서 패배한 박철언은 정계 은퇴 후 시집 3권을 내는 등 시인으로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 YS 정권의 ‘소통령’ 김현철

    김영삼(YS)의 차남 현철은 1987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쌍용증권에서 근무하던 중 아버지의 대통령선거(대선)를 돕기 위해 정계에 투신한다. 87년 대선에서는 외곽에서 선거를 도왔고 92년 대선 때는 여론조사와 선거 전략을 담당해 아버지의 당선에 기여한다.

    그는 아버지가 당선한 후 ‘소통령’ ‘소산’ 소리를 들으며 막후에서 인사와 공천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부와 군, 검찰, 국영기업 등 요직에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대통령이 보고받는 수준의 고급 정보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는 한보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내 곁에서 단물 빨아 먹은 놈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

    ‘김대중의 분신’ 권노갑은 한국 정치사에서 ‘비서정치’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는 평생을 동교동계 맏형으로 전남 목포상고 4년 선배인 김대중을 지켰다. 후배 한화갑과 함께 ‘양갑(兩甲)’으로 불린 권노갑은 1988년 총선 때 목포에서 당선한 후 14, 15대에서도 연거푸 당선해 야권 중진의원으로 발돋움한다. DJ의 모든 조직과 자금을 관리하던 그의 파워는 막강했다. 한때 그의 평창동 집 앞에는 1000명 넘는 인파가 신년인사를 다녀갔고, 자녀 결혼식에 하객 수천 명이 몰리기도 했다.

    누가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한보 사건, 진승현 게이트, 현대 비자금 수수 등으로 3번이나 감옥에 다녀왔다. 그는 최근 자기 묘비에 ‘김대중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 14자만 새길 것이라고 말해 다시 한 번 충성심을 과시했다.

    #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1982년 노무현이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할 때부터 인권변호를 함께 해온 문재인은 노무현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은 노무현과 각별했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실세가 됐다. 그는 ‘왕수석’ ‘왕실장’으로 불리며 ‘2인자’로 주목받았지만 다른 2인자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경남고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일화는 정치권에서 유명하다. 노무현이 어느 자리에서 문재인을 소개하면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 원칙주의자”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 이명박 정권의 ‘만사형통’ 이상득

    이명박 정권에선 ‘만사형통(萬事兄通)’이란 말이 나올 만큼 모든 권력이 형님으로 통했다. 6선 의원에 국회부의장이라는 무게감까지 가졌던 이상득은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감을 지녔다. 이 밖에도 고향 이름을 딴 ‘영일대군’ ‘상왕’ 등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각종 호칭이 따라붙었다. 정권의 2인자 구실을 자처한 그였지만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권력 사유화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2009년 정치 이선 후퇴를 선언해야 했다. 2011년엔 수억 원대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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