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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작은 시작, 큰 행복 ‘나눔’ 07

어려울수록 이웃 생각 돈에서 지식, 재능 기부까지

나눔은 한국인의 소중한 자산이자 가꿔야 할 가치

  • 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어려울수록 이웃 생각 돈에서 지식, 재능 기부까지

어려울수록 이웃 생각 돈에서 지식, 재능 기부까지
돌이켜보면 모두가 어렵고 배고프던 시절, 내 식구 먹을 귀한 보리쌀 한 주먹을 ‘각설이타령’ 한 소절에 선뜻 나눠주던 인심이 우리네 정서 아니던가. 나눔의 미학, 굳이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방법은 달라졌지만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려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은 우리 사회 곳곳에 살아 있다. 이제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던 옛말이 정말 옛날 말이었으면 좋겠다.

일상의 나눔은 한국인 정서

초등학교 무상 급식을 두고 복지 포퓰리즘이다, 아니다라며 참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라가 어려울 때 복지정책의 폭을 넓히는 건 먼 옛날 선조 때부터 해온 일이다. 천재지변이 나거나 흉년이 들어 백성이 먹을 게 부족했을 때 국고를 풀어 백성을 구휼한 기록은 저 멀리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굶주린 백성에게 양곡을 풀거나, 춘궁기에 정부 양곡을 빌려줬다가 가을에 거둬들이는 식이었다. 이러한 구빈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국가의 복지정책 외에도 계, 두레 같은 상부상조 관습과 향촌문화 등은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우리네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히려 요즘엔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만 애써 부르짖다 보니, 나눔의 미덕이 마치 서양에만 존재했던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세상이 각박해져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서로 돕고 의지하던 전통마저 야박하게 퇴색한 느낌이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를 생각하던 선조들의 큰마음, 그것은 우리를 지금껏 이 땅에 살아 숨 쉬게 한 소중한 자산이다. 물려받을 건 물려받고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않을까.

어려울수록 이웃 생각 돈에서 지식, 재능 기부까지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에 나선 대우증권 임직원. 2010년 9월 17일 제1회 대한민국 나눔문화대축제에 참가한 ‘세이브 더 칠드런’ 자원봉사자들이 빈곤 지역 신생아에게 보낼 모자를 뜨고 있다. 2010년 11월 21일 부산 지역의 한 교회 소속 자원봉사자 2000명이 2만 원 상당의 생활필수품이 든 ‘사랑의 상자’를 만들어 어려운 가정에 전달했다. 6월 15일 그랜드하얏트서울 직원들이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는 한 독거노인 집에서 장판과 벽지를 교체하는 봉사활동을 벌였다(위쪽부터).

일생을 바친 선지자의 봉사 DNA



일제강점기 때 석주 이상룡 선생은 전 재산을 처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의 뜻을 따라 경북 안동 전통 명문가인 그의 일가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렇게 일제의 서슬이 시퍼럴 때도 재산 혹은 인생을 통째로 기부한 이가 많았다.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비녀를 팔아 독립자금을 댄 부녀자의 모습도 역사 한구석의 기록이다. 그들의 일생을 단지 ‘기부’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모자람이 적지 않다. 희생, 헌신이라는 낱말로도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한국 기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고 식품산업으로 기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치료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던 사람을 위해 1926년 한국 최초의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비롯해 각종 공익사업과 교육사업을 펼쳤다. 1969년 사업에서 물러나면서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으며, 기업 경영을 가족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맡김으로써 전문 경영인 시대를 선도했다. 그의 이러한 앞선 삶의 철학과 기부 정신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느 기업인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선지자적 모습이 깃들어 있다. 유 박사의 삶이 숭고한 이유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에 들어 미국식 전문 사회사업 교육을 도입했다. 1947년 이화여대가 관련 학과를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1954년 한국장애인 재활협회가 문을 열었고, 그 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YMCA, YWCA, 적십자 등 자선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 단체는 외국 원조 단체의 자선구호 활동과 연관을 맺거나 그 틀을 모방한 것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민간 복지는 외국 원조에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가 어렵고 가난했기에 기부는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남을 돕는 것보다 경제발전이 급선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어려울 때 빛 발하는 기부 문화

지금도 식당이나 매장 계산대에서 ‘100원이 한 생명을 살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저금통을 볼 수 있다. 저금통을 이용한 모금 캠페인은 기부 문화가 생소하던 1983년에 시작했다. 1970년대에 자선음악회, 바자회 등을 통해 모금활동을 펼친 이일하 씨의 아이디어였다. 한국 최초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비정부기구(NGO)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지위’를 부여받은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 역시 이씨의 구상으로 시작했다.

기부 문화가 되살아난 것은 1990년대부터다. 단순히 가진 것을 어떻게든 나누는 수준에서 탈피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나눔의 실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때가 그즈음이다. 특히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힘을 발휘한 ‘금모으기 운동’ 같은 전 국민적 기부 활동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다. 국가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전반에서 나눔의 정신을 높인 계기로 작용했다.

비영리 기부단체가 자리 잡은 것도 1990년대다. 이때 생긴 단체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가 대표적이다. 1997년 ‘사회복지공동모금법’ 공포와 함께 발족한 이 단체는 ‘희망2000이웃돕기캠페인’을 비롯한 범국민 캠페인을 통해 천재지변 등으로 인한 국가 재난사태나 긴급사태 발생 시 국민의 자발적인 기부를 촉구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국내뿐 아니라 아이티 재건 및 복구 및 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 재건 및 복구 등 세계 곳곳의 재난 복구와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에도 발 벗고 나섰다. 글로벌 기부 문화 확산에 힘쓰는 셈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발족과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는 개인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가 결성됐다.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도덕적 자의식이 사회적 의무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난해 각종 비리에 연루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부가 감사에 착수하는 등 국민을 실망시키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확산할 때라 안타까움이 더 컸다.

기부도 개성대로… 21세기형 기부

2000년 설립한 아름다운재단의 ‘1% 나눔운동’은 기부 문화를 다양화하는 데 기여했다. 정기적 수입은 물론이고 유산이나 연금, 휴가비, 결혼비용, 국민연금 등 자신에게 생긴 경제적 수입의 1%를 기부금으로 내자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군자 할머니가 2000년 8월 평생 모은 재산 5000만 원을 기부하면서 시작됐다.

1% 나눔운동은 연예인이나 예술가, 지식인의 재능·지식 기부 등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나눔의 실천으로 확산하고 있다. 가수는 노래를, 화가는 그림을, 무대예술가는 무대 공연을 통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회의 필요한 곳에 기부한다. 의사는 무료 진료로, 변호사는 무료 법률상담으로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 돈을 내는 금전 기부에 비해 지식·재능 기부는 지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 기부 형태라는 점에서 한 단계 진화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수 김장훈 씨처럼 수입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하며 ‘기부 천사’라는 별명을 얻은 이도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의 기부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성금이 주였다면 최근의 기부는 장학금이나 도서관 건립기금, 의료발전기금 등 미래지향적인 목적을 위한 것으로 다양화했다는 사실이다. 김장훈 씨는 불우이웃돕기나 장학사업 외에 독도사랑 캠페인 등 민간외교 활동에도 나섰다. 중소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한 김용철 옹이 평생 모은 100억 원을 국방부에 기부한 사례나 강원랜드 역사상 최고액의 잭팟을 터뜨린 안승필 씨가 당첨금 7억6000만 원을 KAIST에 기부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몸의 일부를 기부하는 사례도 늘었다. 조선왕조 이후 유교문화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온 한국에서 장기 기증 문화가 대중화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몸의 일부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이 해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웃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나눔의 기쁨은 꼭 돈이 많아야 누리는 게 아니다. 무소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하고 열반에 든 법정 스님, 일평생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길을 걷다 떠난 김수환 추기경…. 모두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 큰 깨달음을 우리에게 나눠준 분들이다. 나눔의 실천은 우리의 삶을 더 크고 풍요롭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녔다.

어려울수록 이웃 생각 돈에서 지식, 재능 기부까지

2010년 11월 19일 장애인 및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특별 오디션에 ‘슈퍼스타’ 허각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재능 기부를 했다(왼쪽). ‘양신’ 양준혁이 2011년 3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랑의장기기증운동 본부에서 ‘We are Organ Donors, 생명나눔 친선대사’로 위촉돼 장기기증등록에 동참했다.





주간동아 806호 (p42~44)

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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