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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낯선 땅 외로움, 인성에 상처 날라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가 현지에서 본 조기유학 청소년의 혼란

낯선 땅 외로움, 인성에 상처 날라

낯선 땅 외로움, 인성에 상처 날라

조기유학을 떠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 초등학생 때 유학을 떠나는 비율이 높아지는 등 조기유학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현재 21만여 명의 한국 학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고, 그 비용으로 매년 45억 달러가 유출된다. 이렇게 유학은 이미 ‘보편화한 현상’이지만 정작 유학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거의 전무하다. 필자는 약 3년간 캐나다 토론토대학 정신과 임상의로 근무하면서 진료를 통해, 그리고 실생활을 통해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자녀 유학을 결정하기에 앞서 고려해야 할 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유학생들이 초반에 겪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 외로움이다. 사람과 풍토가 낯선 장소에서 잘 들리지 않고 잘 말할 수 없어 열등하고 저능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인데 외톨이가 됐다면, 그 막막하고 씁쓸한 느낌은 웬만큼 예측했더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럴 때 자기 일처럼 따뜻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선생님이나 친구를 갖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흔하지 않다.

우리식 교육에 길든 아이들 적응 어려워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와 서양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기도 한다. 서구는 끊임없이 찾고 요구해야 뭔가가 이뤄지는 사회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런데 힘든 것을 말로 표현하고 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를 억제하는 ‘우리식 교육’에 길이 든 아이들이 이런 체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또래와의 관계도 생각처럼 만만치 않아 은근한 인종차별도 있고, 영어 구사력이 모자라다 보면 놀림을 당할 수도 있다.

낯선 땅 외로움, 인성에 상처 날라

지난 5월 서울 삼성동에서 열린 ‘조기유학 및 영어캠프 박람회’ 행사장.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말이 통하고 정서가 같은 한국 아이들이 편하다. 함께 축구도 하고 학교 얘기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는 건강한 모임도 많지만, 학교에서도 틈만 나면 모여 웅성거리고(때론 담배도 피우고) 한국 노래방, PC방, 술집 등을 전전하느라 밤을 새우고 수업을 빼먹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토론토 북쪽 신(新)한인타운인 노스욕의 핀치-영 거리에서는 서울의 신천역에서처럼 밤늦게 혹은 새벽까지 삼삼오오 모여 비틀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필자에게도 극도의 외로움과 또래모임에의 유혹에 대한 갈등을 호소한 아이들이 제법 있었는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현실적으로 참 쉽지가 않았다. 청소년의 뇌는 스스로 통제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그래서 어느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선을 그어주는 강력한 외부적 힘이 필요하고, 이 외부적 제한이 내재화하면서 스스로 한계를 그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외부적 힘이 되는 부모, 특히 아버지와 선생님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언행의 한계를 정하고 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또한 부모와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통해 느끼고 배워야 할 것들이 결핍되면서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깊이나 폭을 키우는 데 결함이 생기기 쉽다. 사람과의 관계가 자칫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느냐 아니냐에 집중되고 자기중심적이기 쉽다. ‘기러기’ 가족의 경우 드물긴 하지만 청소년 아들이 어머니에게 극단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비뚤어지는 사례도 있다.

학업은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대학 입학 전까지 서구 사회에서의 ‘공부’와 우리의 ‘공부’는 지향하는 바도, 방식도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공부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기준이라면 서구에선 ‘어떻게 알아가고 알아낸 것을 표현하는가’가 교육의 중심이다. 암기식, 주입식 위주로 훈련받은 우리 아이들은 이런 학교 수업이 낯설고 어렵다.

한국 학생들은 어렸을 때에는 대개 현지 학생들보다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인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학년이 올라갈수록 전문성과 실력을 필요로 하는 학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좀더 쉽게 학위를 딸 수 있는 학과로 옮기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부모와의 튼튼한 관계 무엇보다 중요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고등학교까지 공부에만 치중하다 ‘진짜 공부’가 시작되는 대학 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일하는 것을 적극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인데도, 토론토대학의 경우 신입생 안내문에 ‘적어도 1학년 때는 아르바이트를 자제하고 공부에 전념할 것’을 당부할 정도다.

그만큼 공부 분량이 많고 힘들다는 얘기다. 현지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와 병행해 운동하고 봉사하고 일하는 사이 공부에만 집중한 우리 아이들은 더 좋은 성적을 받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런저런 과외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대학에 합격한 현지 학생들이 입학 후 공부에만 몰두하면, 공부만 하다 합격한 한국 학생들보다 더 큰 경쟁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멀티태스크(Multi-task)를 동시에 하는 것에 익숙해진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 관리가 훨씬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자율적 공부와 타율적 공부의 차이다. 자신이 스스로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 학생들은 말 그대로 밥 먹고 공부만 해도 별 갈등이 없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타율적인 강요에 의한 공부, 시키는 공부에 길들여지며 한편으로 공부에 질린 아이들은 아무리 애써도 스스로 작정해서 하는 아이들보다 공부가 덜 재미있고 쉽게 지치게 마련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낯선 문화도 경험하고 좀더 발전된 공부를 하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유학을 결심했다면 좀더 잘 준비해서 가야 한다. 또한 세심하고 실제적인 관심과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다음은 자녀를 유학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사항이다.

1 유학을 보내기 전에 부모와의 관계를 안정되고 튼튼하게 만들어두자. 외지에서 아이가 힘들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런 튼튼한 부모-자식 관계다.
2 도피성 유학은 재고하자. 익숙한 환경에서도 힘든 아이가 낯선 환경에서 더 잘 지내주기를 바라는 건 무모한 바람이다.
3 적어도 1년 전부터 세심하게 준비하자. 유학원에만 맡겨두지 말고 현지 사정이나 학교에 대해 최대한 상세하게 알아보자. 학교나 해당 교육청 홈페이지에도 들어가보고 직접 e메일을 보내 반응도 살펴보자. 특히 학교나 주거할 곳은 아이의 의견을 일차적으로 존중해 정하자.
4 유학할 학교의 특성을 잘 알아보자. 운동부가 있는지, 밴드부가 있는지 등을 파악해 아이가 합류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초기 적응에 많이 도움된다.
5 일상생활에 필요한 언어 습득에 지나치게 투자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한두 과목쯤 그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구해 예습을 하고 가면 학교나 공부가 덜 낯설다.
6 유학을 보낸 다음에는 전화(화상전화면 더 좋다), e메일 등으로 매일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자. 별로 할 이야기가 없더라도 여기서 아침저녁 보고 인사하듯 꾸준하게 교류를 하며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7 아이가 의논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대상이나 방법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아이에게 주지시킨다.
8 우려할 문제가 생기면 아이는 물론 가디언, 학교 선생, 홈스테이 주인 등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자. 학교와 교육청 시스템을 파악해 문제 발생 시 제대로 된 방식으로 대처하자.




주간동아 2009.07.28 696호 (p68~69)

  • 이성희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마음공간정신과의원장 drelith5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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