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6

2009.07.28

주는 놈, 받는 놈 … 살얼음판의 공생

섹스, 돈, 권력의 매개 ‘스폰서’ 요지경 … 동반자 맹세도 사리사욕 앞에선 물거품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7-20 19: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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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는 놈, 받는 놈 … 살얼음판의 공생
    # 1 서울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 2학년인 A양.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심야에 30대 후반의 사업가 K씨를 만난다. 수업이 끝난 뒤 운동화를 벗고 학과 사물함에 넣어둔 하이힐로 갈아 신는 일이 이젠 어색하지 않다.

    A양은 K씨와 두 달 전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K씨는 A양과 ‘계약연애’를 조건으로 월 300만원의 현금은 물론, 화장품과 옷 등 50만원 상당의 선물을 준다.

    일일 최대 12시간을 함께하며 잠자리는 필수다. A양은 두 달간 주로 K씨의 지인 모임 등에 합석해 연인 노릇을 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A양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학비 걱정을 하던 차에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 여사장에게서 K씨를 소개받았다. 낯선 유부남과 계약연애를 한다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당장 돈이 필요해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두 달간 ‘스폰서’에게서 600만원이라는 거금을 받은 A양. 그러나 혹시 이런 사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까 늘 불안하다.



    최근엔 K씨가 자꾸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걱정이다. 행여 K씨의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제 새벽에 걸려온 낯선 번호의 전화가 혹시?

    # 2 사법시험 3X기 출신인 검사 B씨는 얼마 전 고교 선배와의 저녁약속 자리에 나갔다가 동석한 사업가 L씨를 소개받았다. 선배는 B씨에게 L씨가 친형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B씨와 L씨 사이엔 서먹함이 사라졌다. 취기가 오르자 L씨는 “내가 네 스폰서가 돼주겠다”고 제안했으며, B씨는 별 뜻 없이 맞장구를 쳤다. 그 후 B씨와 L씨는 가끔씩 어울렸고, L씨는 B씨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다. 처음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받았지만 차츰 선물의 ‘강도’가 세졌다.

    B씨는 은근히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L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 사고가 생겨서 내가 고소를 당했어. 이 ‘후원자’ 형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B씨는 머리카락이 주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 3 한 상장기업의 최대 주주이자, 연예 엔터테인먼트 법인의 주식도 보유하고 있는 사업가 J씨는 지난해 초 연예계 관계자를 통해 여자 연예인과 만나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아예 ‘스폰’(스폰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25세. ○○○. ○○모델 출신, TV 드라마 ○○○에 출연.’ 계약서는 마치 보험약관처럼 해당 연예인이 요구하는 ‘특약’ 사항까지 적혀 있었다. ‘만남은 일주일에 3회, 오후 6시 이후 가능. 성관계는 한 자리에서 2회를 초과할 수 없음.’ J씨는 호기심 반, 즐기고픈 마음 반에 월 1500만원의 스폰서 계약을 맺었고, 그 연예인에게 푹 빠져 6개월 후엔 25평형 아파트와 월 생활비 1000만원, 500만원 한도의 신용카드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2년 장기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하자마자 계약금과 일부 선금까지 지불했다. 그러나 최근 J씨의 해외유학 등으로 관계를 ‘해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여자 연예인과 매니저가 아파트 잔금을 해결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 돈을 주지 않으면 J씨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스폰서’ 관계. 그러나 당사자들의 속내는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다. 말이 좋아 ‘바라는 것 없이 도와주고 도움 받는’ 스폰서 관계이지, 대부분 떳떳하지 않은 음성적 후원이 오가기 때문이다.

    앞의 사례들에서 보듯 스폰서 관계는 주로 일방적으로 한쪽이 돈을 후원하고 그 대상자에게 은밀히 혹은 노골적으로 후원금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스폰서십, 예를 들어 예술이나 체육 분야의 유망주에 대한 후원과는 거리가 먼 이런 관계를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 관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음성적이고 불안전한 이들의 공존은 영원한 동반 관계로 이어지는 대신 종종 파국으로 치닫는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내와 측근에게 돈을 제공한 후원자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의 진술에 발목이 잡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찰총장에 내정된 천성관 전 서울중앙지검장도 스폰서와의 관계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치명타를 입었다.

    스폰서와 피(被)스폰서. 금전으로 맺어진 이들의 관계에선 애초부터 순수한 후원이란 불가능한 일일까.

    “음성적 스폰서 요구는 노예로 살려는 것”

    고려대 사회학과 현택수 교수는 “만일 공적, 사적 영역에서 스폰서십 형태로 손을 잡은 당사자들이 포괄적인 사리사욕을 드러내는 관계라면 그것은 봉사, 자선, 동정, 투자 및 계약 개념이 아닌 특혜이자 뇌물, 로비를 위한 동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위험한 관계를 강제로 혹은 스스로 해체시킬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부재하고 윤리의식이 희박하다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이정옥 교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같은 일종의 ‘인적 공공재’들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 채 사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공개적으로 도움을 구하지 않고 음성적으로 스폰서를 찾는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 노예제도에 편입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한 사회학자는 “공무원의 경우 대부분 후원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돈이나 접대를 받을 때 ‘이래선 안 되는데’ 하면서도 좀처럼 관계를 끊지 못한다. 그러다 후원자 주변에 형성된 2차 인맥에 가담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2006년 법조브로커 윤상림 로비 의혹사건이 대표적이다. 윤씨에게서 주기적으로 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고위 공무원, 고위급 경찰 인사, 현직 판사 등은 대체로 윤씨와의 관계 유지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가 자신의 인맥을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생관계’라는 틀을 깰 경우 윤씨가 험담을 하고 다니거나 옛 일을 폭로할까봐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스폰서 관계는 일종의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스폰서의 폐해가 계속 터져나오고 있지만 거기에선 분명 희망의 싹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즉, 스폰서십 관행이 공직자나 정치인을 오히려 범법행위로부터 지켜내는 차선책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물론 여기엔 높은 윤리의식이라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황 교수는 “‘인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절대 돕지 마세요’라고 할 수는 없다”며 “당사자들이 돈에 영혼을 팔지 않도록 지켜보고 도와주는 시스템이 작동한다면 둘의 관계를 딱히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는 후원자를 주로 그림자와 초상(肖像)에 비유했다. 후원받는 사람보다 후원하는 사람이 덜 빛나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일을 가늠할 수 없는 요즘의 ‘불안한 동거’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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