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7

2009.03.17

“이게 사는 거야?”

  • 편집장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9-03-12 1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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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사는 거야?”
    초가을 들녘 연보랏빛 코스모스 같은 애인을 사귀고 있습니다. 나이차가 무려 서른 살, 연하(年下)가 아니라 세하(世下)라 해야겠지만 서로의 눈빛에 즉각 반응할 만큼 어렵지 않게 마음을 읽어내는 사이입니다. 한쪽은 하루하루 세상 물정을 깨쳐가고 다른 한쪽은 갈수록 생각이 단순해져가는 터라, 친구 같기도 한 둘의 ‘평균율’ 연주가 썩 매끄러운 편입니다. 저와 딸아이(덤 앤 더머?) 얘깁니다.

    요즘, 그런 애인을 뺏긴 기분입니다. 학원이라는 압도적 연적(戀敵)에게요. 과학고 준비반에 등록한 딸아이가 학원을 마치면 밤 11시입니다. 집에 와서 씻고 숙제하고 문제 풀면 일러야 새벽 2시께 잠자리에 듭니다. 엊그제 중2가 됐는데 ‘실력 수학의 정석’을 배웁니다(‘더머’인 저는 고교 졸업 때까지 ‘기본 수학의 정석’을 못 뗐습니다). 생물 올림피아드에 대비해 ‘생명과학’이라는 1400쪽짜리 대학 교재를 봅니다(따라오든 말든 수준 높은 교재를 세 번쯤 반복해 가르치면 대충 풍월은 읊는다는 게 이른바 ‘선행학습’의 원리더군요). 수시로 반편성 시험을 치러 성적순으로 뉴턴-퀴리-다윈-허블반에 배치합니다(뉴턴이 허블보다 4배쯤 위대한 과학자인 모양입니다). 저녁시간으로 10분을 주는데, 담뱃갑보다 조금 큰 도시락을 절반도 못 먹고 옵니다. 학부모 간담회 때 엄마들이 “애들 밥 먹는 시간은 넉넉히 주면 좋겠다” “주말 수업을 좀 줄일 수 없겠냐”고 했더니 지엄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학원 아이들은 대개 중1 때부터 특목고 준비를 하지만, 강남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합니다. 걔들보다 진도가 1년 반 이상 느리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찍. 저와 집사람은 ‘강북’의 ‘서민동네’에 사는 ‘맞벌이 부부’에다 ‘입시정보 까막눈’입니다. 4대 원죄를 다 짊어졌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미리 챙겨주지 못해 뒤늦게 고생하는 아이한테 미안할 따름이지요. 측은한 마음에 옆구리 쿡 찌르며 “할 만하냐?”고 물으면 아이는 눈도 안 마주친 채 “이게 사는 거야?” 하고 맙니다. 찍. “까짓 과고 못 가면 어때. 그저 실력 쌓는 기회라고 생각해. 하는 데까지 해보다 안 되면 마는 거지 뭐”라며 나름 관대하고 합리적인 부모인 양 슬쩍 발을 뺍니다.

    소설가 이기호 씨는 “선거에서 현 대통령을 찍지 않았고 지금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 땅의 교육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다면 어떤 욕을 먹더라도 그를 지지할 마음”이라고 썼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부모라고 생각이 다르겠습니까. 딸아이가 앞으로 5년이나 더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그렇다고 학력평가 거부, 특목고 폐지, 사교육 금지 같은 극단적 처방이 해결책은 아닌 듯합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의 영재성은 일찌감치 발견해 최적의 여건에서 꽃피울 수 있게 해야 하고, 자신을 던지다시피 그런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열성도 제대로 보상받아야 합니다. 주간동아 편집실이 갑론을박 끝에 초등학생 입시전략을 이번 호 대특집 커버스토리 주제로 정한 것도 비록 씁쓸하되 엄연히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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