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6

2005.03.15

이승기의 성공, 여경구의 자살 월북 과학자들의 명암

  •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parkstar@unitel.co.kr

    입력2005-03-10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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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기의 성공, 여경구의 자살 월북 과학자들의 명암

    비날론을 개발한 고 이승기 박사.

    정부는 이번 3·1절을 기해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필자는 몽양 선생 하면 화학공학자 여경구(1913~77)가 떠오른다. 1958년 염화비닐 연구의 뜻을 이뤄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북한의 대표적인 과학자다. 그런데 그는 1977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여운형의 사촌동생 여운일의 큰아들이니 몽양의 조카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 일본 도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고분자화학을 공부했고, 해방 직후 서울대 공대 교수로 재직하다 46년 3월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운형은 1940년 일본 천왕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일본 황궁에서 그의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여경구였다.

    여운형의 딸로 북한에서 크게 활약한 여연구(1927~96) 씨는 여경구가 여운형의 권유로 월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꼭 누구의 권유 때문에 월북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해방 전후의 조선 젊은이들은 상당히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 누가 권하지 않았더라도 지식층이라면 월북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월북한 여경구는 적어도 두세 차례 남쪽에 내려와 당시 서울대 공대 학장이던 이승기(1905~96) 박사를 북으로 데려가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도 엿보인다. 일제 강점기 첫 조선인 공학박사인 이승기는 교토(京都)제대에서 화학공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특히 1939년 새로운 합성섬유 ‘비날론’을 발명한 인물이다. 여경구의 권유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이승기는 49년 7월 월북하기에 이른다. 두 사람은 모두 6·25전쟁(1950) 이후 크게 성공하여 함흥 일대에 대규모로 건설되던 북한의 화학공업단지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특히 여경구가 개발한 염화비닐과 이승기가 개발한 비날론 가운데 어느 것을 주로 개발할지에 대한 논쟁으로 북한 과학계는 50년대에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김일성은 이승기의 손을 들어줬고, 그 후 북한은 비날론으로 섬유 혁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승기는 제1회 인민상 레닌상 김일성상 등을 받으며 온갖 영예를 누리다가 96년 사망했는데 성대한 국장(國葬)을 거쳐 애국열사능에 안치됐다. 여경구의 자살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이 그리도 노력해 월북시켰던 이승기의 눈부신 성공에 희생됐을 수도 있다(필자는 그런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또한 여경구의 자살 사건에 떠오르는 또 다른 인물은 미국의 화공학자 캐러더스(1896~1937)다. 미국 최대의 화학회사 듀퐁의 연구원이던 그는 1937년 사상 최대의 선풍을 일으켰던 인공섬유 ‘나일론’을 발명했다. 그런데 2년 뒤, 나일론의 발명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 방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생을 포기했다. 1년 전 결혼해 같은 연구소의 연구원이던 아내가 임신 초기였으나 자기 딸이 아내 몸에서 자라고 있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 것이다.

    여경구는 도대체 왜 자살했을까. 그리고 나일론의 발명자 캐러더스는 자신의 위대한 성공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왜 자신의 삶을 포기했을까. 한국의 한 여배우가 번민 속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위대한 과학자도 뭔가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사실이 문뜩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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