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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사실혼이 뭐기에

재벌가 축첩부터 동반자관계까지 그들은 왜 사실혼을 택했나

법률혼〉사실혼〉동거〉내연관계?…제도 밖의 부부 공동생활 규정할 장치 필요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재벌가 축첩부터 동반자관계까지 그들은 왜 사실혼을 택했나

재벌가 축첩부터 동반자관계까지 그들은 왜 사실혼을 택했나

[Shutterstock]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사실혼관계에 있는.’ 한때 언론에 자주 등장한 표현이다. 롯데그룹 탈세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르내린 서미경 유원실업 대주주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서씨는 ‘미스 롯데 선발대회’ 출신으로 1970년대 연예계 활동을 했다. 이후 신 총괄회장과 사이에서 딸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딸이 88년 신 총괄회장 호적에 오르면서 서씨와 신 총괄회장은 ‘사실혼관계’로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법률 전문가들에 따르면 서씨는 신 총괄회장의 ‘사실혼 배우자’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사실혼은 법률혼에 준할 만큼 엄격한 기준에 따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신 총괄회장에게는 이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을 낳은 일본인 아내 시게미쓰 하츠코 씨가 있다. 최근 법원은 시게미쓰 씨 역시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신 총괄회장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임을 확인했다. 신 총괄회장에 대한 성인후견인 지정 신청 사건을 심리하면서다. 이에 따라 신 총괄회장은 현재 법적 배우자가 없는 상태다. 하지만 시게미쓰 씨는 1950년대부터 대외적으로 롯데가 안주인 노릇을 했고, 대중도 신 총괄회장이 그와 혼인한 상태라고 여겼다. 이 경우 뒤늦게 형성된 서씨와 신 총괄회장의 관계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 설명이다. 전원책 변호사는 “신 총괄회장의 행위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법이 금지하고 있는 축첩에 해당한다”며 “거기다 사실혼이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최태원 회장의 동거가 사실혼이 아닌 이유

재벌가 축첩부터 동반자관계까지 그들은 왜 사실혼을 택했나

'사실혼'과 관련해 세간의 입길에 오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위)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동아일보] [동아일보]

지난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혼외자의 존재를 알리는 편지를 언론에 공개했을 때도 법조계에서는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다수 매체가 ‘최 회장과 상대 여성이 수년 동안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고 한 데 대해서다. 우리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법률상 혼인을 한 부부가 별거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다른 한쪽이 제3자와 혼인의 의사로 실질적으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를 사실혼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혼인 의사, 동거 등이 사실혼관계를 인정하는 데 필요조건이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대법원에 따르면 사실혼은 ‘당사자 사이에 주관적으로 혼인 의사가 있고, 객관적으로도 사회관념상 가족질서적인 면에서 부부 공동생활을 인정할 만한 혼인생활의 실체가 있을 때’ 제한적으로 인정된다. 구체적인 사안에서 우리 법원은 당사자들이 결혼식을 올렸거나 대외적으로 상대방을 ‘여보’ ‘당신’이라고 부른 경우, 또 가족과 이웃에게 자신들을 부부라고 소개하고 서로의 가족모임에 참석한 경우 등을 사실혼관계로 봤다. 이처럼 엄격한 판단 기준을 두는 이유는 일단 사실혼관계가 인정되면 당사자가 여러 법률에서 법적 배우자에 준하는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58쪽 기사 참조).



우리 민법 제812조는 ‘혼인은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정한 바에 의하여 신고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고 규정한다. 즉 원칙적으로 우리 법이 보호하는 혼인은 ‘신고된 혼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이런 원칙이 생긴 건 1920년대 일제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 조선은 혼례를 치르면 곧 결혼한 것으로 보는 ‘의식혼주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청 신고가 혼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자 사회적 혼란이 빚어졌고, 특히 혼례만으로 혼인이 완성된 것으로 여긴 여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혼인관계가 성립하면 혼인의 효력을 인정하는 사실혼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



혼인 성립 기준은 약자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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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소송 전문을 내세우는 한 변호사 사무실 안내판. 우리 법원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사실혼의 범위를 매우 좁게 해석한다.[동아일보]

우리 가사소송법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실상 혼인관계 존부 확인’에 대한 소송이 규정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조항에 따르면 혼인 성립요건이 다 갖춰진 뒤에도 당사자 일방이 협력하지 않아 혼인신고를 못 할 경우 다른 당사자는 법원에 ‘우리 사이에 사실상 혼인관계가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낼 수 있다. 법원이 이를 확인해주면 단독으로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 민법 제812조 2항에 규정된 ‘혼인신고는 당사자 쌍방과 성년자인 증인 2명이 연서한 서면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의 예외인 셈이다.

이에 대해 엄경천 법무법인 ‘가족’ 변호사는 “한쪽이 혼인에 협조하지 않는데 법원이 보기에 혼인관계를 인정할 만하다는 이유로 혼인신고를 받아주는 건 사실상 혼인을 강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우리 법원은 사실혼 관련 소송에서도 해당 관계의 실질보다 보호가치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법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관계라고 판단되면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사실혼으로 봐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혼인의 실질을 갖춰도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후자를 부르는 이름은 보통 ‘내연관계’나 ‘동거’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적잖은 여성이 배우자의 유기, 학대 등으로 고통받았던 한국적 현실에서 법원의 이러한 태도는 한동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순기능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처럼 법률혼을 원칙으로 삼고, 사실혼을 예외적으로 인정하며, 그 외 관계를 법의 보호 밖에 두는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달라지는 가족의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1년 자체 보고서를 통해 ‘회원국 대부분에서 출산율 감소, 무자녀가구 증가, 결혼율 감소와 이혼율 증가, 비전통적인 파트너십(동거 등) 증가, 사실혼관계 출산 증가, 한부모가족과 재혼가족 증가 등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회원국의 사실혼관계 출산율이 1980년 11%에서 2007년 33%로 3배 증가했다고도 소개했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간한 ‘가족변화 대응 가족정책 발전방향 및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가족형태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1990년 전체 가족의 58%이던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의 비중은 2020년 41.4%까지 감소하고, 1인 가구 비중은 같은 기간 15.6%에서 29.6%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전문가들이 우리나라도 사실혼 개념을 일반적인 동거에까지 확대 적용하고, ‘보호할 가치가 있는 관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관계’까지 정책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특히 일선 변호사들은 우리나라도 더 늦기 전에 노인들의 ‘황혼 동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망 앞둔 남편 상대로 소송 건 이유

재벌가 축첩부터 동반자관계까지 그들은 왜 사실혼을 택했나

최근 특정 이성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동거하며 말년을 함께 보내는 노인이 많아지고 있다. [동아일보DB]
노인의 성(性)과 삶을 다룬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아래)

법조계에 따르면 요즘 노인층에서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특정 이성과 장기간 함께 사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고령화와 이혼율 증가 등으로 홀로된 노인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는 데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줄어든 영향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법률상 혼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박현정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는 이에 대해 “우리 민법은 상속이 개시되면 배우자가 자녀보다 더 많은 몫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의 연애는 눈감아줘도 재혼은 강력히 반대하는 경우가 적잖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부모가 다른 이성과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환으로 판단능력이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혼인무효를 신청하는 자녀도 있다고 한다.

문제는 현재 한국에서 동거관계를 유지하던 노인 커플 중 한쪽이 사망할 경우 남은 한 명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법원은 사실상 혼인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생존한 상태에서 관계를 끝내면 일방이 상대방에게 위자료 및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동거 중 한쪽이 사망할 경우 남은 이에게 상속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사실상 배우자로서 망자의 병구완을 하고 임종까지 지킨 경우도 마찬가지다.  

2013년 헌법재판소(헌재)에는 이와 관련해 ‘본질적으로 동거·부양·협조의무 등에서 법률혼 배우자와 차이가 없는 사실혼 배우자를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일부 재판관이 이에 대해 ‘사실혼 배우자의 상속에 관한 권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생전에 사실혼관계가 해소된 경우 재산분할 청구권을 인정하는 것과 비교할 때 불균형적’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헌재는 최종적으로 ‘사실혼 배우자에게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상속권,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한 변호사는 “언젠가 한 할머니가 오랫동안 사실혼관계에 있던 남편이 중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자 그를 상대로 재산분할을 청구한 일이 있다. 재판이 마무리되기 전 남편이 사망해 결국 소가 기각됐는데,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배우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상대가 죽으면 아무것도 못 받으니 더 늦기 전에 내 몫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에는 일부 로펌이 ‘사실혼 전문 변호사 확보’를 내놓고 광고할 정도로 관련 분야 소송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자유로운 동반자관계도 보호해야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접수한 사실혼 관련 상담 건수도 2011년 209건, 2012년 235건, 2013년 238건, 2014년 215건 등 매년 200건 이상이다. 우리나라에 법률혼주의를 도입한 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적잖은 사람이 사실혼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이런 문제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전문가들은 동거계약 활성화를 제안한다. 우리 민법 제829조는 혼인 성립 전 예비부부가 재산관계에 대해 자유롭게 약정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엄경천 변호사는 “민법 계약편 등에 이와 유사한 규정을 둬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이들도 부부재산 약정을 할 경우 보호하는 게 좋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성인이 당사자 간 합의에 따라 동반자관계를 맺기로 하고 이를 담당 관청에 신고하면 정부가 소득세 공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 의료기록 열람권 부여 등 법률상 부부관계에 준하는 법률적 지위를 인정해주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방식이 기존 결혼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청년으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꾸리도록 유도해 출산율 제고 등의 효과를 낼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는 유럽 각국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2000년 ‘시민연대협약(Pacte civil de la solidarite·PACS)’을 제정해 동거 커플이 출산한 자녀에게도 법률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와 동일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경우, 2012년 전체 출생아 가운데 55%가 사실혼관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1993년 1.6명에 불과하던 프랑스 출산율은 2012년 2.01명까지 상승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혼인율과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동반 하락하는 추세다. 통계청이 4월 발표한 ‘2015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는 지난해 5.9건으로 관련 통계를 작성한 1970년 이래 최저치다. 지난해 전체 혼인 건수도 30만2800건으로 전년 대비 0.9%(2700건) 감소세를 보였다.

이에 대해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우리나라는 결혼제도 밖에 있는 생활공동체 가운데 매우 작은 부분만 제한적으로 법률혼에 준해 보호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혼인 의사가 아예 없는 상태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가족형태가 많아지고, 이들을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도 커지고 있다”며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가족형태를 연구하고,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간동아 2016.09.14 1055호 (p54~57)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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