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음식으로는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등의 산채비빔밥이 제격이지만 그 못지 않게 춘삼월 눈을 뚫고 나온 곰취의 어린 싹으로 끓인 곰취죽만한 것이 없다. 곰취죽을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집은 그 넓은 지리산 자락에서 꼭 한 군데가 있다. 구례읍에서 산동 산수유꽃 마을과 온천장을 휘둘러 천은사(泉隱寺)를 통과하고, 시암재, 성삼재를 넘고 노고단을 넘어 뱀삿골에 숨어 있는 달궁의 ‘달궁 에미집’이 바로 그 집이다.
한식 기와집에 상호는 대성휴게식당(정완호·063-626-3506)이지만, 생각보다는 따뜻한 방에서 몸을 녹이고 곰취죽 한 사발에,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음양곽)로 담근 산벚꽃 잎을 띄워내는 삼지구엽주가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지리산의 음식 맛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봄이야기를 쓰려는 중이다. 곰도 한겨울엔 배가 고프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불같은 그 싹을 핥고 기운을 차린다는 곰취나물, 그 어린 싹에 숨어 있는 민족의 메시지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반야봉이나 종석대, 노고단이나 적령치에 눈이 녹고, 산벼랑에 걸린 고드름발이 풀어지면 이 음식의 선미를 만끽한다. 곰취죽이나 곰취쌈밥말고도 가죽잎 무침과 참취나물 진달래 화전이나 커피잔에 떠도는 산벚꽃잎, 두릅 향이나 엄나물 등 이런 선미를 어디에 가서 누릴 것인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그 봄날도 저물고 세석 평전의 철쭉꽃밭을 넘어가는 지리산 빨치산들, 그 봄이야기가 어찌 이 시대의 산해진미를 무색하지 않게 하겠는가. 5악(嶽) 중 남악인 지리산, 옛 화랑들이 넘나들며 부르던 노래는 처용가나 찬기파랑가쯤 되었을 것이다.
남부군의 ‘이현상 루트’가 무너지고 정순덕(편집자주 : 여자 빨치산)이 최후의 망실 유격대 맥을 잇기까지 또는 비전향 장기수 60여 명이 북으로 송환되고 남북경협 시대가 열린 지금, 공비(共匪)라는 용어는 삭제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이것이 지리산의 봄을 봄답게 하는 곰취죽의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들고 ‘달궁 에미집’을 찾아갈 때는 삼한(三韓)적 마을 텃노래였던 ‘단동치기’(壇童治基) 노래를 부르며 가야 할 것이다. 달궁은 우리 국토에서 가장 오래된 상고적 마을이기 때문이다.
시상시상 달궁/ 섬마섬마 달궁
재얌재얌 달궁/도리도리 달궁
이 곰취죽에 스민 노래까지 안다면 죽맛은 한결 산뜻하고 달보드레할 것이다. 아니 겨울 곰처럼 곰발바닥 같은 곰취싹을 핥고 나면, 꺼져가는 이 시대의 민족정기는 물론 검약과 절제의 기운까지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메시지를 읽고 ‘달궁 에미집’에 가면 오미자향의 차는 덤으로 붙고, 보기에 좋다는 삼지구엽주도 덤으로 나올 것이다. 두릅향이나 참머위향, 조피향이나 산초 향도 그만이다. 그러나 반백 년 산속의 세간살이- 거창·함양 양민학살사건, 여순사건, 4·3 사건, 6·25전쟁 등 서러웠던 봄이야기를 모른다면 이 봄에 지리산에 갈 필요가 없다(곰취죽 1인분 7000원, 쌈밥은 서비스, 삼지구엽주 1ℓ 1병 2만원).
주간동아 285호 (p9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