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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밖의 과학

악마는 ‘엔트로피’를 입는다!

‘맥스웰의 악마’가 발견해낸 열역학의 역설

  • 궤도 과학 커뮤니케이터 nasabolt@gmail.com

악마는 ‘엔트로피’를 입는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 · Fox 2000 Pictures]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 · Fox 2000 Pictures]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 분)는 뉴욕 최고 패션 잡지 ‘런웨이’에서 괴팍스러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리프 분)의 비서로 일한다. 최선을 다해 편집장을 보필하지만 악마 같은 보스는 그녀를 지옥으로 안내한다. 지금도 악마라는 단어가 나오면 강령술과 무관한 이 코미디 영화가 떠오를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무시무시한 악마가 물리학에도 존재한다. 바로 ‘맥스웰의 악마’다. 

맥스웰의 악마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열역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열역학은 말 그대로 열과 역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열은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있을 때 온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이동하는 에너지 전달 방식을 의미한다. 보통 일상에서는 뜨겁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다른 하나인 역학은 외부에서 힘을 받는 물체의 상태를 설명하는 물리학 분야로, 이때 물체가 움직인다면 일을 했다고 친다.


엔트로피 감소가 진짜 ‘감소’가 아닌 이유

[위키피디아,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위키피디아,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프랑스 물리학자 사디 카르노는 열과 역학의 관계를 가장 쉽게 설명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카르노 기관이라는 장치를 머릿속에서 설계했다. 수증기의 열에너지를 움직이는 일로 바꾸는 증기기관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온에서 저온으로 흐르는 열을 일로 바꾸는 가상의 열기관인데, 이론상 존재하는 최고 효율을 갖고 있어 들어간 열에서 빠져나온 열을 제외한 남은 모든 열만큼 일을 해낸다. 

중도에 손실되는 열이 없기에 열효율이 매우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1이 될 수는 없다. 그러려면 열기관의 고온 부분 온도는 무한대로 높아지고 저온 부분은 절대온도 0도(섭씨 영하 273.15도)까지 떨어져야 하는데, 이런 상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열기관도 카르노 기관보다 열효율이 높을 수 없다. 하나의 열원으로부터 얻은 열을 전부 일로 바꿀 수는 없다는 뜻이다.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할 때만 일을 할 수 있으며, 반대 경우에는 반드시 외력이 작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카르노는 증명했다. 아직 엔트로피라는 용어조차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열역학 제2법칙’의 위대한 발견이었다. 

카르노는 콜레라에 걸려 36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다행히 1850년 그의 유지를 이은 독일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에 의해 ‘열역학 제2법칙’이 발표됐다. 1865년에는 이걸 활용한 엔트로피 개념이 등장했다. 클라우지우스가 그리스어를 조합해 만든 단어인 엔트로피는 열역학에서 에너지 흐름을 설명한다. 열이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만 흐르는 상황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질서도’라는 용어와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우선은 ‘깨진 컵이나 정돈되지 않은 트럼프 카드는 무질서도가 높다’ 정도로만 알아두자. 이제 드디어 맥스웰의 악마가 등장할 차례다. 




[GettyImages]

[GettyImages]

‘맥스웰의 악마’ 이론 이미지. [위키피디아]

‘맥스웰의 악마’ 이론 이미지. [위키피디아]

전자기학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열역학에 관한 연구를 하다 문득 가상의 악마를 떠올렸다. 어떤 방이 빠르게 움직이는 뜨거운 기체와 느리게 움직이는 차가운 기체, 두 종류로 가득 차 있다. 간단하게 구분하기 위해 빨간 기체와 파란 기체라고 부르자. 이 방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는 벽이 가운데 있고, 벽에는 문이 달려 있다. 악마는 벽의 문을 여닫을 수 있고, 매우 뛰어난 시력을 가져 두 기체 분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제 악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차례다. 나뉜 두 방에 대한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악마는 오른쪽 방에 있는 빨간 기체가 문 쪽으로 다가오면 얼른 문을 열어 왼쪽 방으로 보내고, 왼쪽 방의 빨간 기체가 접근하면 문을 절대 열지 않는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왼쪽 방에는 빨간 기체로만 가득 채우고, 오른쪽 방에는 파란 기체만 남길 것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뜨겁고 빠른 기체와 차갑고 느린 기체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초기 상태와 비교하면 엔트로피가 감소하지 않을까. 잘 정리가 돼 무질서도가 낮아졌으니 말이다. 별일이 아닌 것 같지만 물리학자들에겐 심각한 문제가 됐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자리를 잘 잡은 열역학 제2법칙을 대놓고 부정하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고립돼 있는 방에서 어떠한 일도 해주지 않았지만, 방의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다는 건 당시 큰 충격이었다. 마치 복잡하게 어질러진 잡지사 사무실이 메릴 스트리프의 등장 소식만으로 일사불란하게 스스로 정리되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해결책이 등장했다. 악마는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기체 분자에 대한 정보를 얻고 기체를 분리하기 위해 방 내부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었다. 기체를 제대로 이동시키기 위해 양자역학의 관측과 유사한 측정 행위가 일어나며, 이러한 과정은 기체 분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악마가 만들어내는 엔트로피 변화를 고려하면 총 엔트로피는 절대로 감소하지 않게 된다. 메릴 스트리프의 출몰과 함께 사무실이 정리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사무실이 정리되는 만큼 그 과정을 지켜보는 그녀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는 뜻이다. 심지어 계속 정리되고 있는 집기들을 바라본 기억을 지우는 동안에도 점점 열을 받아 최소한 그것만큼의 엔트로피가 추가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감소한 기체 분자의 엔트로피를 상쇄시키며 증가하는 엔트로피를 정보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우주 종말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

다시 엔트로피로 돌아가보자. 멀쩡한 컵과 정돈된 트럼프 카드는 엔트로피가 낮고, 깨진 컵과 흐트러진 트럼프 카드는 엔트로피가 높다. 일반적인 설명은 여기까지지만, 실제론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상식선에서 이해하는 무질서도만으로 엔트로피를 설명하는 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컵이 깨져 있건, 잘 붙어 있건 컵을 구성하는 입자 관점에선 확률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물질을 구성하는 배열로만 봐서는 무엇이 더 무질서한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물질이 놓여 있는 공간의 크기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컵이 놓인 식탁 위의 공간 전체를 생각해보자. 컵을 구성하고 있는 아주 작은 부스러기들이 식탁 한편에 모여 컵을 이루거나 부서져 식탁 전체에 퍼져 있을 경우의 수를 각각 계산해보면, 부서져 있는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서진 컵 조각들이 원래 컵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잘 없지만, 컵이 깨져 조각나는 경우는 쉽게 발생한다. 주어진 공간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가 줄어들면 엔트로피를 낮다고 표현하며, 반대 경우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현실 세계는 식탁 위보다 끝없이 넓고, 부스러기들은 컵보다 훨씬 다양하기에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변화는 반드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특히 우주 역시 물질과 에너지 출입 없이 고립된 거대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기에,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 이건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항상 움직이며 한쪽으로 향하는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로 시간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 역시 언젠가 우주 전체에 고르게 퍼질 테고, 가장 높은 확률을 갖는 형태에 도달하고 나면 더는 변화하지 않는 채로 멈출 것이다. 우주 종말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엔트로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엔트로피가 감소하면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지 않을까. 방금 친구들이 놀러와 난리가 난 방을 아무리 어제처럼 깨끗하게 정리한다 해도 어제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총 엔트로피는 증가했을 수도 있다. 이미 맥스웰의 악마도 실패했을 정도니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패션계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을지 모르겠지만, 과학사의 악마는 엔트로피를 입는다. 만약 엔트로피를 빼고 물리학을 논한다면, 논리적으로 벌거벗었다 해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전히 과학의 오래된 역사에는 악마가 여럿 남아 있다. 악마를 활용한 참신한 이론들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것이다. 무한한 사고의 어둠 속으로 과학자들을 끌어들이는 순진한 악마를 더 보고 싶다. 아마 과학자들도 기꺼이 즐거운 고통의 길로 악마와 함께 걸어 나가리라.

궤도는…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주간동아 1280호 (p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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