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은 매주 수요일 아침 약 50명의 사장단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다. 이른바 ‘삼성 사장단 강연’이라 부르는 이 자리에 강사로 초청되는 이는 식견이나 통찰력 면에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48번에 걸쳐 진행된 강연 중 34명의 강사가 대학교수였다. 1월 7일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2015년 한국 사회 키워드’로 한 해 강연의 문을 연 뒤, 김대식·오준호 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조광수·이준기 연세대 교수 등 국공립대와 사립대 교수가 두루 초청됐다.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고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한 계기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시절 열었던 강연 ‘청춘콘서트’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강의는 요즘 한국 사회에서 대학교수가 하는 가장 일반적인 대외활동이다. 그런데 조만간 이런 분위기에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9월 시행 예정인 ‘김영란법’(정식 명칭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영향이다. 이 법 제10조 1항은 ‘공직자 등은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거나 그 지위·직책 등에서 유래되는 사실상의 영향력을 통하여 요청받은 교육·홍보·토론회·세미나·공청회 또는 그 밖의 회의 등에서 한 강의·강연·기고 등의 대가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을 초과하는 사례금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한다. 최근 이 조항이 대학교수들 사이에서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영란법 시행령안 입법예고
3월 국회가 김영란법을 제정했을 때만 해도 해당 조문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원활한 직무수행 또는 사교·의례 또는 부조의 목적으로 제공되는 음식물·경조사비·선물’ 등을 제한하는 제8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그러나 5월 13일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가 김영란법의 구체적 기준을 밝힌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행령안 별표 2에 외부강의 등에 대한 사례금 상한액을 적시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해당 법안에 따르면 공무원이 외부강의 등을 할 때 받을 수 있는 시간당 사례금 상한액은 장관급 이상 50만 원, 차관급 40만 원, 4급 이상 30만 원, 5급 이하 20만 원이다. 강의시간이 1시간을 초과해도 초과 사례금은 상한액의 2분의 1을 넘길 수 없다. 즉 공무원인 국립대 평교수가 3시간짜리 강연을 할 때 받을 수 있는 최대 사례금은 30만 원인 셈이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지만 공무원이 아닌 법인화된 서울대 교수와 공공기관 임직원 등의 강연료 상한액은 더욱 낮다. 김영란법 시행령안은 이들의 시간당 강연료를 기관장 40만 원, 임원 30만 원, 그 외 직원 20만 원으로 각각 규정했다.
강연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강사의 강연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특히 대학교수와 공공기관 임직원의 경우 행사 취지나 주최 측 사정 등에 따라 탄력적으로 강연료를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오상익 오간지프로덕션 대표는 “시민사회단체나 학생 주도 강연의 경우 사회공헌 차원에서 무료로 강단에 서는 사례가 없지 않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업 혹은 영리재단 주최 강연의 경우 강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한다. 한 대중강연 에이전트는 “막 데뷔한 초보 강사는 수십만 원 안팎의 사례금을 받기도 하지만 경력이 쌓이고 명성을 얻으면 1회 강연에 150만 원 이상 받는 게 보통이다. 방송 출연과 저술 활동 등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일부 인기 강사의 경우 최고 1000만 원까지 받는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김성근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감독은 지난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작년에 강연료 세금으로만 3억 원 가까이 냈다”고 한 일이 있다. 현행 세법상 강연료에는 4.4% 세율이 적용된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 계산하면 김 감독의 1년간 강연료 수입은 60억 원 이상일 것이라는 추산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직업군으로 볼 때 가장 높은 강연료를 받는 이는 방송인이나 문화예술 및 스포츠계 인사라고 한다. 하지만 대학교수도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은 경우 사례금이 30만 원을 넘어서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한 대학교수는 “교수의 외부강의는 학자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지식과 경험을 대중과 나누는 자리다. 돈을 목적으로 강연에 나서는 교수는 한 명도 없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대중강의는 학교 수업과 완전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한 번 강의를 하려면 별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여건과 상황에 맞게 교수들이 그 수고의 보상을 받기도 하고 또 전적으로 봉사하는 의미로 무료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법이 일괄적으로 ‘시간당 20만 원’이라는 기준을 정해주는 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노벨상 수상자도 100만 원?
김영란법이 대학사회에 촉발한 논란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사립대 교수와 국공립대 교수의 강연료 상한액이 다르다는 점이다. 사립대 교수의 경우 ‘외부강의 1시간당 100만 원 이하’라는 규제를 받는다. 이에 대해 의학 세미나를 주로 개최해온 한 업계 관계자는 “의대교수들이 세미나에 강사나 토론자로 참석할 경우 50만 원 안팎의 사례금을 지급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같은 행사 참석자라도 국공립대 교수와 사립대 교수의 사례금이 달라질 상황”이라며 “참석자 간 이유 없이 차등을 두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상한액 제한에 걸리지 않는 사립대 교수의 사례금까지 깎을 수도 없어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논란거리는 이 법이 ‘속인주의’를 바탕으로 집행된다는 점이다. 즉 한국인 교수는 외국에서 강연해도 김영란법의 제약을 받는다. 반면 외국인 교수는 한국에 와서 강의할 때 제한 없이 강연료를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노벨상 수상자의 경우 보통 시간당 1000만 원 수준의 강연료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그 정도 대우를 받는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경우 어떻게 될까”라고 꼬집었다.
대학교수가 김영란법을 위반해 고액 강연료를 받는다고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김영란법은 공직자가 금품을 받을 경우 최고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강연료 상한액 위반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단, 김영란법 적용 대상인 자가 동법의 규정을 초과하는 사례금을 받고 이를 ‘지체 없이 반환하지 않은’ 경우 5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한다. 권익위는 입법예고 기간이 끝나는 6월 22일까지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받아 시행령을 확정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