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유전개발 의혹 사건은 그야말로 넓게 보고 자세히 살피는 대관소찰(大觀小察)을 해야 한다. 먼저 대관부터 해보자. 세계 제1의 석유 수입국은 미국이고, 2위는 일본, 4위는 한국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소비하는 나라도 역시 미국이고, 2위 중국, 3위 일본, 한국은 7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중-일이 모여 있는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17%를 소비하는 초대형 에너지 시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원유 생산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세 나라는 주로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는데, 세 나라로 가는 중동발(發) 유조선은 이란이라는 위협세력이 있는 호르무즈 해협과 해적 출몰 수역으로 유명한 말라카 해협을 지나야 한다. 또 중동 산유국들은 동북아로 가는 원유에 대해 1배럴당 1달러 정도 더 비싸게 받고 있다. 이름 하여 ‘동북아 프리미엄’이다.
이렇게 세 나라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수급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가격 면에서는 약간 불이익을 보지만 공급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어, 세 나라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중동산 석유 공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두 해협이 봉쇄되면 세 나라는 그날로 가격 및 수급 파동을 겪어야 한다.
러시아 석유 50% 매장된 극동러시아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산업화를 이룩한 일본과 한국은 석유 비축기지를 구축해왔다. 일본은 대략 117일분을, 한국은 109일분을 저장할 수 있는 비축기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비축기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비축기지에 석유를 채우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하루에 소비되는 총 원유의 가격은 8000만 달러다(1배럴당 40달러에 하루 소비량 200만 배럴로 계산). 그러니 109일분의 원유를 비축해둔다면 이는 87억 달러를 땅속에 그냥 묻어둔다는 계산이 된다.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자 한 푼 나오지 않는 ‘블랙 머니’를 땅속에 묻어두는 것은 바보짓이다.
일본은 부자 국가인지라 비축기지를 거의 다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갑이 얇은 한국은 겨우 70일분 정도만 채워놓았다(1990년대). 전쟁 위험이 있는 한국이 일본보다 원유 비축분이 적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 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석유회사 처지에서 석유는 제품이므로, 어디엔가 석유를 보관해뒀다가 소비자가 찾으면 내주는 ‘창고’가 있어야 한다. 한국은 석유회사에게 비축기지를 창고로 빌려주기로 한 것. 이렇게 하면 석유회사들은 한국의 비축기지를 거의 채워놓게 되고, 유사시 한국이 이 석유를 최우선으로 구입한다는 약속을 맺어둔다면, 한국은 돈 벌어가면서 유사시를 대비하는 ‘봉이 김선달’이 될 수가 있다.
눈을 돌려 세계 석유시장을 바라보자. 세계 석유의 물류기지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형성돼 있다. 싱가포르는 한술 더 떠서 물류기지이면서 동시에 런던, 뉴욕과 더불어 세계적인 석유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시장이 생산지가 아닌 다른 곳에 형성돼 있는 것은 한국 농산물 유통시장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한국 농산물은 농촌에서 생산되지만, 한국 최대의 농산물 시장은 서울 가락동에 있다.
한국이 주목한 것은 석유 물류기지이면서 석유시장을 형성한 싱가포르였다. 한국이 채우지 못한 비축기지를 외국 석유회사에 빌려준다면, 한국은 국제적인 석유 물류기지가 될 것이고, 여기에 발달한 IT(정보기술)를 이용해 국제 금융거래망을 갖춘다면 한국은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 석유시장이 될 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해나갈 때쯤 극동러시아가 새로운 유전지대로 떠올랐다. 연해주를 비롯해 10개 지역으로 구성돼 있는 극동러시아는 면적이 남한의 64배에 달하는 데 비해, 인구는 800만명에 불과한 지역. 그러나 이곳에는 러시아 석유의 50%, 러시아 가스의 70%가 묻혀 있다.
하지만 이 통계는 땅속 1000m 정도까지만 시추해서 나온 것. 요즘 채굴은 3000~4000m까지 내려가므로, 좀더 깊은 곳까지 조사해본다면 극동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은 훨씬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러니 중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한-중-일 세 나라는 일제히 극동러시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석유 장사 덕분에 지난 10여년간 빠르게 경제성장을 한 러시아는 한-중-일의 석유 러브콜로 인해 동북아 문제에 대해서도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 것이다.
석유 덕분에 입김 커진 러시아
러시아 처지에서 현재 가장 큰 시장은 중국이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하고 장차 미국 서부지역도 시장에 넣겠다는 고려까지 한다면 일본이 선호하는 나홋카로 송유관을 내는 게 유리하다. 그리하여 러시아 유전개발과 함께 나홋카까지의 송유관 건설에 대한 논의가 동북아 국가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국은 러시아 유전개발과 송유관 사업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또 국제 석유회사들로 하여금 러시아 송유관에서 나온 석유를 받아 한국의 비축기지에 저장했다가 판매케 한다면 한국은 동북아의 석유 물류를 관장하는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철도를 통해 러시아 석유를 북한을 통해 한국까지 끌어온다면 석유 물류는 한반도 통일에도 큰 기여를 할 수가 있다.
남북한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철도 잇기에 합의했는데, 한국에서는 철도공사가 이 사업을 담당해야 한다. 더구나 철도공사는 남북한 철도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해 유럽까지 잇는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으므로 부대사업으로 러시아 유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구상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만개했다. 에너지 주무 부서인 산업자원부와 에너지 문제를 다루는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두 기관은 동북아 석유 물류 문제에 대한 다양한 발표회와 정책구상회를 주도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탄생한 동북아시대위원회는 한국을 동북아 중심국가로 만드는 방안을 연구하는 곳이다. 한국이 동북아의 석유시장이 된다면 한국은 이 지역의 균형자 임무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위원회도 석유 물류를 이용해 한국을 이 지역의 중심국가로 만든다는 데 대해 산업자원부 이상으로 앞장설 필요가 있었다.
입법부에서도 호응이 나왔다. 2004년 10월3일 국회 산업자원위 소속 열린우리당의 초선의원인 이광재·김태년·서갑원·한병도 씨는 ‘한국도 영국의 BP처럼 초대형 석유개발사를 세워야 한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유전개발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에너지 정책 4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산업자원부의 고위 관료는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 등을 통합해 초대형 석유개발 회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석유사업가들이 재빨리 러시아와 한국을 뛰어다녔다. 이들은 러시아 유전과 한국의 유전사업자를 연결하는 중개인인데, 유전개발 사업은 규모가 크므로 떨어지는 ‘구전’이 상당하다. 이들 처지에서는 러시아 유전사업을 지원하는 정치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광재 씨 측근이 지난해 총선을 전후한 시점에서 석유사업자에게서 돈을 받은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리베이트 규모 큰 유전개발 사업
그러나 러시아 유전개발을 통해 한반도를 재통일하고, 한국을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커다란 맹점을 안고 있다. ‘북핵’과 ‘미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장벽을 간과한 것이다. 2차 북핵 위기를 계기로 미국은 북한에 중유 공급을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석유 공급하는 것을 북핵 해결의 한 수단으로 보았다. 때문에 무조건적인 대북 석유 지원에 반대한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에 북한에 대한 석유류 공급을 중단해달라는 부탁을 넣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결국 러시아 석유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나라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탁에 모여야 하는 6자회담 참가 국가와 똑같다. 북핵 문제로는 갈등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유전 문제에서만 뜻을 모을 수 있겠는가.
산업자원부와 에너지경제연구원, 동북아시대위원회, 그리고 이광재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의 구상은 안보 측면을 간과하고 시장 측면에서만 동북아 문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들의 대관은 허점을 안고 있었다.
이제 이 문제를 소찰해보기로 하자. 철도공사가 브로커의 소개로 투자하려다 계약금을 떼이게 된 것은 ‘사할린 6광구’ 건이다. 브로커들은 철도공사에 앞서 이 광구를 한국석유공사에도 소개했다. 석유공사는 유전사업에 대해 전문적으로 컨설팅해주는 슐럼버거(Schlumberger)사를 통해 이 유전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슐럼버거 측의 결론은 한마디로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high risk low return)’이었다. 그 후 현지조사를 한 석유공사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진출을 포기했다(지난해 7월).
이런 가운데 2004년 9월21일로 예정된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일자가 다가오자, 비전문가 집단인 철도공사가 9월3일 ‘덜컹’ 이 유전을 사들이겠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과거 러시아는 사할린산 원유와 가스를 배에 실어 북한에 공급했다. 러시아산 석유는 67년 체결된 ‘조·소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 협정’에 따라 나진역(서선봉역)상에 건설된 승리정유(북한 이름은 승리화학)에서 처리하는데, 승리정유와 나진항(선봉항) 사이에는 길이 3.2km, 직경 53cm의 파이프라인이 설치돼 있다. 철도공사가 생산한 석유는 이곳을 거쳐 남북철도를 달릴 수 있다.
그 후 철도공사 측도 슐럼버거 자료를 입수해 사할린 6광구가 경제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 사업을 추진하는 ‘이해하기 힘든 실수’를 저질렀다. 남북철도연결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구상에 너무 매달린 것이다. 한마디로 철도공사는 소찰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동북아 중심국가가 되어야 한다’ ‘통일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구상이 만개한 가운데 객관적인 대관을 하지 못하고 ‘대통령 러시아 방문 전에 한 건을 올려야 한다’는 명분에 눌려 소찰까지도 소홀히 한 것이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 사건에 깔려 있는 실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원유 생산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세 나라는 주로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는데, 세 나라로 가는 중동발(發) 유조선은 이란이라는 위협세력이 있는 호르무즈 해협과 해적 출몰 수역으로 유명한 말라카 해협을 지나야 한다. 또 중동 산유국들은 동북아로 가는 원유에 대해 1배럴당 1달러 정도 더 비싸게 받고 있다. 이름 하여 ‘동북아 프리미엄’이다.
이렇게 세 나라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수급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가격 면에서는 약간 불이익을 보지만 공급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어, 세 나라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중동산 석유 공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두 해협이 봉쇄되면 세 나라는 그날로 가격 및 수급 파동을 겪어야 한다.
러시아 석유 50% 매장된 극동러시아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산업화를 이룩한 일본과 한국은 석유 비축기지를 구축해왔다. 일본은 대략 117일분을, 한국은 109일분을 저장할 수 있는 비축기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비축기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비축기지에 석유를 채우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하루에 소비되는 총 원유의 가격은 8000만 달러다(1배럴당 40달러에 하루 소비량 200만 배럴로 계산). 그러니 109일분의 원유를 비축해둔다면 이는 87억 달러를 땅속에 그냥 묻어둔다는 계산이 된다.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자 한 푼 나오지 않는 ‘블랙 머니’를 땅속에 묻어두는 것은 바보짓이다.
일본은 부자 국가인지라 비축기지를 거의 다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갑이 얇은 한국은 겨우 70일분 정도만 채워놓았다(1990년대). 전쟁 위험이 있는 한국이 일본보다 원유 비축분이 적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 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석유회사 처지에서 석유는 제품이므로, 어디엔가 석유를 보관해뒀다가 소비자가 찾으면 내주는 ‘창고’가 있어야 한다. 한국은 석유회사에게 비축기지를 창고로 빌려주기로 한 것. 이렇게 하면 석유회사들은 한국의 비축기지를 거의 채워놓게 되고, 유사시 한국이 이 석유를 최우선으로 구입한다는 약속을 맺어둔다면, 한국은 돈 벌어가면서 유사시를 대비하는 ‘봉이 김선달’이 될 수가 있다.
눈을 돌려 세계 석유시장을 바라보자. 세계 석유의 물류기지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형성돼 있다. 싱가포르는 한술 더 떠서 물류기지이면서 동시에 런던, 뉴욕과 더불어 세계적인 석유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시장이 생산지가 아닌 다른 곳에 형성돼 있는 것은 한국 농산물 유통시장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한국 농산물은 농촌에서 생산되지만, 한국 최대의 농산물 시장은 서울 가락동에 있다.
러시아 유전지대 모습.2004년 9월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 철도공사는 이 회담이 있기 직전 사할린 6광구를 계약했다.
이러한 발상을 해나갈 때쯤 극동러시아가 새로운 유전지대로 떠올랐다. 연해주를 비롯해 10개 지역으로 구성돼 있는 극동러시아는 면적이 남한의 64배에 달하는 데 비해, 인구는 800만명에 불과한 지역. 그러나 이곳에는 러시아 석유의 50%, 러시아 가스의 70%가 묻혀 있다.
하지만 이 통계는 땅속 1000m 정도까지만 시추해서 나온 것. 요즘 채굴은 3000~4000m까지 내려가므로, 좀더 깊은 곳까지 조사해본다면 극동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은 훨씬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러니 중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한-중-일 세 나라는 일제히 극동러시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석유 장사 덕분에 지난 10여년간 빠르게 경제성장을 한 러시아는 한-중-일의 석유 러브콜로 인해 동북아 문제에 대해서도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 것이다.
석유 덕분에 입김 커진 러시아
러시아 처지에서 현재 가장 큰 시장은 중국이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하고 장차 미국 서부지역도 시장에 넣겠다는 고려까지 한다면 일본이 선호하는 나홋카로 송유관을 내는 게 유리하다. 그리하여 러시아 유전개발과 함께 나홋카까지의 송유관 건설에 대한 논의가 동북아 국가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국은 러시아 유전개발과 송유관 사업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또 국제 석유회사들로 하여금 러시아 송유관에서 나온 석유를 받아 한국의 비축기지에 저장했다가 판매케 한다면 한국은 동북아의 석유 물류를 관장하는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철도를 통해 러시아 석유를 북한을 통해 한국까지 끌어온다면 석유 물류는 한반도 통일에도 큰 기여를 할 수가 있다.
남북한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철도 잇기에 합의했는데, 한국에서는 철도공사가 이 사업을 담당해야 한다. 더구나 철도공사는 남북한 철도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해 유럽까지 잇는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으므로 부대사업으로 러시아 유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발간한 동북아 석유사업에 관한 연구서들.
노무현 정부 들어 탄생한 동북아시대위원회는 한국을 동북아 중심국가로 만드는 방안을 연구하는 곳이다. 한국이 동북아의 석유시장이 된다면 한국은 이 지역의 균형자 임무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위원회도 석유 물류를 이용해 한국을 이 지역의 중심국가로 만든다는 데 대해 산업자원부 이상으로 앞장설 필요가 있었다.
입법부에서도 호응이 나왔다. 2004년 10월3일 국회 산업자원위 소속 열린우리당의 초선의원인 이광재·김태년·서갑원·한병도 씨는 ‘한국도 영국의 BP처럼 초대형 석유개발사를 세워야 한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유전개발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에너지 정책 4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산업자원부의 고위 관료는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 등을 통합해 초대형 석유개발 회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석유사업가들이 재빨리 러시아와 한국을 뛰어다녔다. 이들은 러시아 유전과 한국의 유전사업자를 연결하는 중개인인데, 유전개발 사업은 규모가 크므로 떨어지는 ‘구전’이 상당하다. 이들 처지에서는 러시아 유전사업을 지원하는 정치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광재 씨 측근이 지난해 총선을 전후한 시점에서 석유사업자에게서 돈을 받은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리베이트 규모 큰 유전개발 사업
그러나 러시아 유전개발을 통해 한반도를 재통일하고, 한국을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커다란 맹점을 안고 있다. ‘북핵’과 ‘미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장벽을 간과한 것이다. 2차 북핵 위기를 계기로 미국은 북한에 중유 공급을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석유 공급하는 것을 북핵 해결의 한 수단으로 보았다. 때문에 무조건적인 대북 석유 지원에 반대한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에 북한에 대한 석유류 공급을 중단해달라는 부탁을 넣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결국 러시아 석유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나라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탁에 모여야 하는 6자회담 참가 국가와 똑같다. 북핵 문제로는 갈등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유전 문제에서만 뜻을 모을 수 있겠는가.
산업자원부와 에너지경제연구원, 동북아시대위원회, 그리고 이광재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의 구상은 안보 측면을 간과하고 시장 측면에서만 동북아 문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들의 대관은 허점을 안고 있었다.
이제 이 문제를 소찰해보기로 하자. 철도공사가 브로커의 소개로 투자하려다 계약금을 떼이게 된 것은 ‘사할린 6광구’ 건이다. 브로커들은 철도공사에 앞서 이 광구를 한국석유공사에도 소개했다. 석유공사는 유전사업에 대해 전문적으로 컨설팅해주는 슐럼버거(Schlumberger)사를 통해 이 유전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슐럼버거 측의 결론은 한마디로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high risk low return)’이었다. 그 후 현지조사를 한 석유공사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진출을 포기했다(지난해 7월).
이런 가운데 2004년 9월21일로 예정된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일자가 다가오자, 비전문가 집단인 철도공사가 9월3일 ‘덜컹’ 이 유전을 사들이겠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과거 러시아는 사할린산 원유와 가스를 배에 실어 북한에 공급했다. 러시아산 석유는 67년 체결된 ‘조·소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 협정’에 따라 나진역(서선봉역)상에 건설된 승리정유(북한 이름은 승리화학)에서 처리하는데, 승리정유와 나진항(선봉항) 사이에는 길이 3.2km, 직경 53cm의 파이프라인이 설치돼 있다. 철도공사가 생산한 석유는 이곳을 거쳐 남북철도를 달릴 수 있다.
그 후 철도공사 측도 슐럼버거 자료를 입수해 사할린 6광구가 경제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 사업을 추진하는 ‘이해하기 힘든 실수’를 저질렀다. 남북철도연결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구상에 너무 매달린 것이다. 한마디로 철도공사는 소찰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동북아 중심국가가 되어야 한다’ ‘통일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구상이 만개한 가운데 객관적인 대관을 하지 못하고 ‘대통령 러시아 방문 전에 한 건을 올려야 한다’는 명분에 눌려 소찰까지도 소홀히 한 것이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 사건에 깔려 있는 실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