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패권을두고 미국과 중국의경쟁이 치열해지고있다. 사진은 생성형인공지능(AI) ‘달리3’로만든 관련 이미지. 이장훈 제공
미국 정부가 4월 15일 중국의 AI 굴기를 견제하고자 자국 AI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중(對中) 수출 통제 조치를 내렸다. AI 반도체 수출 통제 지침에는 △D램 대역폭 1400GB(기가바이트) 이상 △입출력(I/O) 대역폭 초당 1100GB 이상 △이 둘을 합쳐 대역폭 초당 1700GB 이상 등이 포함됐다. 미국 정부는 이들 반도체를 수출할 경우 반드시 허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를 통해 중국이 AI 모델 훈련과 추론에 필요한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엔비디아 年 26조 원 손실 전망
미국 정부는 2022년 10월 국가안보를 이유로 AI 반도체 제조업체들의 대중 수출을 처음으로 금지했다.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반도체 A100·H100의 대중 수출을 통제한 것이다. 이에 엔비디아는 저성능 AI 반도체 A800·H800을 중국에 수출했다. 해당 칩은 연산을 처리하는 연결 속도 성능이 A100·H100보다 떨어진다. 중국이 해당 칩을 쌓아 올리는 후공정을 통해 고성능 반도체를 만들어내자 미국 정부는 2023년 10월 새로운 수출 통제 기준인 ‘성능 밀도’(Performance Density: 단위 크기당 성능)를 도입해 A800·H800의 대중 수출도 금지했다. 이후 엔비디아는 A800·H800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H20 반도체를 개발해 중국에 수출해왔지만 이번 조치에 따라 H20 반도체도 수출길이 막혔다.H20은 딥시크가 AI 모델 학습에 사용한 칩 중 하나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4월 15일 공시를 통해 “정부가 H20 칩을 중국으로 수출할 때 상무부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고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55억 달러(약 7조8500억 원) 규모의 손실을 올해 1분기 실적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H20 재고와 주문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는 데 따른 손실 등을 종합한 액수다. 엔비디아의 연간 손실은 140억~180억 달러(약 20조~26조7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반도체 수출 규제가 발표된 다음 날인 4월 16일 엔비디아 주가는 6.87%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4월 2일(이하 현지 시간)백악관에서 상호 관세부과와 관련된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이를들어 보여주고 있다. 뉴시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수출 통제 조치를 막고자 4월 4일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찬 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황 CEO는 향후 4년 동안 대만 TSMC, 폭스콘 등과 협력해 자국에서 AI 하드웨어를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투자 규모가 최대 5000억달러(약 714조3500억 원)임에도 결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통하지 않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조치는 트럼프 정부가 AI 반도체 수출에 본격적인 제한을 가한 첫 사례”라며 “딥시크가 저비용-고효율 AI 모델을 내놓자 미국 내에선 AI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돼왔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엔비디아의 매출 급감을 감수하더라도 ‘제2 딥시크’ 출현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또 AMD와 인텔에도 대중 AI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를 내렸다. 인텔의 경우 AI 전용 가속기 칩인 ‘가우디’ 시리즈가 수출 통제 대상이다. 가우디 시리즈는 거대언어모델, 생성형 AI 등 대규모 연산이 필요한 AI 학습과 추론을 전담하도록 설계된 특수 목적용 반도체다. 고성능 메모리 대역폭과 뛰어난 병렬 처리 능력을 갖춘 만큼, AI 서버 시장을 겨냥해 인텔이 역량을 집중해온 제품이다. 현재 가우디 시리즈가 인텔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크지 않지만 인텔은 이 제품을 향후 성장전략의 핵심 축으로 보고 있다.
엔비디아의 최대 경쟁사로 꼽히는 AMD도 저성능 AI 칩인 MI308을 중국에 수출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8억 달러(약 1조 원) 손실이 불가피하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중국에 최첨단 AI 칩과 장비 수출을 통제하면서도 저성능 반도체 수출은 허용하는 식으로 자국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중단했다.
이번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관세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정부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희토류 수출을 통제하자, 미국 정부도 중국의 최대 약점인 AI 반도체 수출을 차단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AI 업계는 미국산 AI 반도체를 대체할 제품이 당장 마땅치 않다. 중국 최대 통신기업 화웨이가 엔비디아의 H100에 필적할 만한 성능을 가진 AI 반도체 ‘어센드 910C’를 개발했다고 밝히는 등 중국의 AI 반도체 제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국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보복에 나선 셈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최고경영자가 3월 19일연례 개발자 회의 ‘GTC2025’에서 기조연설을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엔비디아 H20 칩의대중(對中) 수출 통제를발표하자 엔비디아주가는 다음 날 6.87%급락했다. 뉴시스
중국, 반도체 자립에 박차
미국 정부는 기술 유출 역시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국 하원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는 최근 발표한 딥시크 조사 보고서에서 딥시크가 미국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딥시크는 일반적인 AI 챗봇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으로 데이터가 유출되게 한다”며 “대중 수출이 금지된 미국 반도체를 기반으로 미국 기술을 훔쳐 가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이 위원회는 중국 AI 모델의 위험성에 대처하기 위해 싱가포르 등 중국으로 빠져나갈 위험이 높은 지역으로의 수출도 면밀히 조사할 것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미국 정부는 딥시크의 자국 기술 구매를 막는 조치를 저울질하고 있으며, 미국 국민의 딥시크 접근을 차단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또 엔비디아가 규정을 위반해 딥시크에 AI 기술을 고의로 제공했는지 살펴보고 있다.중국 정부는 첨단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3440억 위안(약 67조2400억 원) 규모의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3차 펀드를 조성한 바 있다. 이 기금은 고성능 반도체 기술 자립과 AI 연구개발에 집중 투입되고 있다. 또 올해 1월 AI 스타트업을 지원하고자 초기 자본금 600억 위안(약 11조7000억 원) 규모의 AI 국영 펀드를 조성했다.
중국 빅테크 기업들도 AI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있다. 중국 국영 투자은행 중국국제금융공사(CICC)의 첸리앙 회장은 “알리바바 등 중국 빅테크 기업은 앞으로 6년 동안 AI 분야에 10조 위안(약 1954조8000억 원) 자금을 투자할 것”이라면서 “2030년까지 중국 AI 시장 규모는 5조6000억 위안(약 1200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내놓은 저성능 AI 반도체의 대중 수출 금지 조치로 중국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수 있겠지만 앞으로 AI 반도체 기술 자립에 박차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관세전쟁 한가운데서 AI 패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