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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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골 칠두령의 백수생활 노하우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9-07-20 2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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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석골 칠두령의 백수생활 노하우

    고미숙 지음/ 사계절 출판사 펴냄/ 338쪽/ 1만2000원

    “우리 시대는 대화의 소중함을 강조해대면서도 실상 주고받는 이야기는 참 빈곤하기 짝이 없다. 친구들끼리 모여 나누는 이야기란 게 주로 두 가지다. 남을 헐뜯는 거 아니면 자기 자랑하는 거. 그나마도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로 남의 이야기나 나랑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나 인터넷, 개그 프로그램에서 본 것들이 거의 전부다. 자신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정신과 병원에나 가야 꺼내놓는다.”

    국문학자 고미숙이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서 진단한 우리 현실이다.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삭막한 세상이 된 것은 공유하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 또는 이야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라 볼 수 있지만 공유하는 이야기가 없으니 이제 이야기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만 높다.

    노에 게이치는 ‘이야기의 철학’에서 완결된 언어구조체로서의 이야기(story)와 타인을 향한 언어행위로서의 이야기(narrative)는 개념적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너무 많은 친구, 너무 많은 이야기, 너무 많은 삶이 종횡으로 얽힌’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은 스토리인가, 내러티브인가.

    저자는 ‘임꺽정’을 스토리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선전기 사상사 백과사전 격인 ‘임꺽정’의 서사는 모두 사료에 근거한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미숙은 벽초 홍명희가 정사와 야사, 각종 설화 등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팩트’를 이리저리 엮어서 거대한 서사의 그물망을 직조해냈다는 학계의 시각을 철저히 수용한다.



    노에 게이치는 또 “역사적 사건은 인간적 문맥 안에서 생성되고 증식·변모하며, 나아가 망각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거는 변화한다”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임꺽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지금 이 시대의 문맥에서 새롭게 이야기(narrative)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에 이야기를 창조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고미숙은 임꺽정의 ‘칠두령’을 청년 백수들로 판단한다. 지금도 백수는 넘쳐난다. 정규직은 언제 떨려날지 모르는 잠재적 백수에 그치고, 백수나 다름없는 비정규직은 희망이 없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고미숙은 ‘칠두령’이라는 청년 백수들 삶의 양식에서 그 비전을 찾는다.

    칠두령이 함께 살았던 청석골은 추방당한 자들이 아닌 탈주한 자들이 몰려든 일종의 인디언 부락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유동성, 낡은 가치들을 교란하는 불안정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역동적인 야생성 등을 창조해낸다. 이것은 코쿤(cocoon) 같은 안정된 집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의 새로운 양식’이다.

    이 시대 한없이 길로만 내몰리는 백수들은 도망자들의 막다른 거점이자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기도 했던 청석골의 마이너리그 백수인 칠두령이 벌인 향연에서 비전을 찾아볼 만하다. 저자는 책에서 그 역할을 대신 수행하며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 등 7개의 관점에서 칠두령 향연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시도한다.

    경제적으로는 마이너들이 주류적 가치에서 자유로워지는 공동의 삶을 창안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물품들 간 활발한 순환에 접속하거나 돈을 선물로 변환해 거대한 순환을 이루는 것과 같은 원초적 본능을 되살릴 수 있는 경제적 노하우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칠두령은 모두 활, 표창, 돌팔매 등의 달인이다. 그들은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논다. 그것은 일상이며 일상에서 입말을 통해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한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간접 체험하는 이야기는 소통의 수단이자 오락이요 예술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출구이기도 했다. ‘임꺽정’ 서사의 뼈대는 우정이며 우정은 철두철미 연대의 윤리다.

    따라서 친구들과 모든 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정의 경제학이야말로 청년실업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몸과 몸이 직접 교통하는 야성적인 사랑은 고독과 외로움이 천지의 기운을 막히게 해 발생하는 생태계의 교란을 막고 만물의 본성에 순응하는 길이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청년 백수를 위한 ‘케포이필리아(Kepoi-philia)’를 제시한다. ‘공부와 밥과 우정의 향연’을 뜻하는 이 독특한 개념어는 간단하게 말하면 백수가 자유인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쯤 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 비전과 신체적 능력이 필요하다. 백수라는 실존적 조건을 당당하게 긍정하는 철학을 공부해서 시간의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부리며 살면서 달인의 경지로 올라서야 한다.

    그렇게 확보한 자유시간은 신체적 능력을 단련하는 정밀한 훈련을 통해 평소 익히고 싶었던 기술이나 재능을 집중적으로 터득하는 데 써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청석골 두령들이 온몸으로 보여줬던 삶의 철학이다. 이처럼 저자는 오늘날 힘겹게 살아가는 백수라는 인간의 시점에서 ‘임꺽정’이라는 이야기의 ‘복권’을 독특하게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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