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의 작가는 그 자리에선 “못 쓸 것 같다”고 거절하지만 집에 돌아와 새 노트를 꺼내 ‘남자’라고 쓴다. 편집장의 포르노 소설 제의에 그동안 자신이 남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적이 없음을 깨닫고 마음이 동요된 것이다. 결국 작가는 남성을 정면에서 깊이 파고든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서 작가는 물론 유미리 자신이다. 유씨는 지난 2월17일 미혼모로 아기를 낳은 지 한달 만에 노골적인 성 묘사로 가득한 소설 ‘남자’를 출간해 일본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작품은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성 관계로 만난 남자를 총동원해 몸의 각 부분(눈, 귀, 입술 등)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경련을 일으키며 잔잔하게 떨리고 있는 핑크색의 가느다란 음순, 남자는 발기된 페니스를 꽉 잡고, 그 끝만을 그곳에 갖다 댄다. 이 장면을 감시 카메라의 소리 없는 영상으로 보는 것과, 도청기로 엿듣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흥분될까?” 그러나 부분만 읽고 이 소설이 도발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문장의 힘으로 독자에게 성적 흥분을 안겨주는 데(그것이 애초의 집필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실패했다. 섹스에 대한 표현 수위는 높지만 성에 대한 차가운 관조가, 눈 똑바로 뜨고 키스하는 것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평론가 권명아씨는 “작가의 관심은 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관계다. 왜 인간은 성욕이라는 에너지에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작가는 필연적이고도 일관되게 섹슈얼리티를 탐구해 왔다”고 말한다. 허호 교수(수원대 일본어학과)는 이 소설을 “자기 자신을 실험대로 삼은 성(性)문학의 도전”이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과 성 담론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하고, 그 위를 걷는 작가들의 모습은 위태롭다. 최근 국내 여성작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사소설’ 혹은 ‘성장소설’이나, 서갑숙씨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로 촉발된 ‘성 체험 에세이’는 우리 사회에 예술적인 성(性)과 포르노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고전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주었다. 덧붙여 왜 여성작가들이 이토록 ‘몸’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불러일으켰다.
이 시점에서 최근 잇따라 발표된 김별아씨의 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이룸)와 배수아씨의 산문집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이룸)를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김씨의 ‘내 마음…’은 이미 5년 전 출간됐던 것을 다시 펴낸 것이다. 제목 그 자체의 자극(하지만 미안하게도 포르노그라피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다)과 형광색 표지의 ‘시선 끌기’에서, 출판사가 잊힌 원고를 새삼 5년 만에 다시 꺼내든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 마음…’은 성장소설의 형태로 연애와 결혼, 출산의 과정까지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이 “풍선처럼 터질 듯한 호기심을 지닌 소녀들과, 죄의식과 갈등에 들끓고 있는 미혼 여성들, 탄로나 버린 비밀에 대한 허탈함과 모성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힌 기혼 여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창한 의도만큼 결과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일반인의 눈높이에서도 그리 대단치 않은 작가의 성 체험을 본격적인 성 담론으로 끌어올리기에 역부족이었던 걸까. 결국 그저 그런 자전적 소설에 머물러 버렸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는 것과 역시 제목이 눈에 띈다는 이유로 주목받은 배수아씨의 산문집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는, 그러나 ‘몸’에 대해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분석한다. 대부분 글에서 작가 자신이 드러나지 않지만 ‘친구에게 성욕을 느꼈을 때’ ‘사람들은 왜 차에서 하는 것일까’처럼 일상에서 쉽게 체험하는 욕망을 텍스트로 삼았다.
“몸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의식 중에 죄의식을 갖는 문화를 우리는 물려받았다. 나무꾼에게 누드를 보인 선녀는 그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현재에 와서도 은밀하게 보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몸은 이제 상품화의 극단으로 갈 데까지 가서 여자의 가슴이나 엉덩이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자극이 된 것이다.”(‘관음증에 관하여’ 중에서)
배씨는 “제목만 보고 책을 잡았다가 읽고 나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며 웃는다. 그만큼 그의 글은 기대만큼 야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뻔한 이야기를 뛰어난 글 솜씨로 적당히 포장해 놓았다는 혐의도 받을 만하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나르시스’에서 쓴 대로 “스스로를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 그래서 끊임없이 만지고 싶은 사람으로 대상화하려는” 작가를 만나게 된다. 굳이 자신의 성 체험을 소재로 삼지 않았지만 ‘몸’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심진경씨는 ‘문학사상’ 3월호에서 90년대 여성문학에 나타난 ‘몸’의 문제를 이렇게 해석했다.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 몸에 대한 상상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 특히 여성은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통해 개별적으로 육체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하기 때문에, 여성작가들에게 몸은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이 때 몸은 단순히 여성적 체험의 공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에게 억압적이고 모순적인 현실이 은유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 된다.”
평론가 김미현씨도 “몸 자체가 현실인 여성이 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그동안 30대 여성작가들을 지배해온 ‘불륜 패러다임’이 제도적 모순, 즉 가부장적 억압에 짓눌리면서도 관계에 집착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였다면, 그 이후 세대는 몸을 메타화함으로써 비로소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신세대 작가 혹은 여성작가들의 ‘몸’과 ‘성’에 대한 관심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90년대 초반 신세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학정신’ ‘토마토’ 등 신생 잡지를 통해 성에 대한 도발적인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김큰물, 박청호씨 등의 노골적 성교 묘사는 평단을 당혹케 할 정도였다.
김병익씨는 “이들은 성교접에 대해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동물적 행위로서의 섹스로만 묘사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성에 대한 기성세대의 위선과 부정직을 벗기는 솔직함이라기보다 독자에게 훔쳐보기의 외설스러운 감각만 도발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들의 성에 대한 솔직함(권명아씨는 이를 ‘해방적 개인주의’라고 설명한다)은 쉽게 진부한 것이 됐고 얼마 뒤 이들은 문단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