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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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의 미식세계

굴비, 그중에도 깊게 곰삭은 보리굴비

일 년 내내 구할 수 있는 진미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19-01-14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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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 가운데 값과 맛에서 으뜸인 참조기. [사진 제공·김민경]

    조기 가운데 값과 맛에서 으뜸인 참조기. [사진 제공·김민경]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가까이 살았다. 할머니는 아들을 일곱이나 낳고, 딸은 겨우 하나 낳았다. 나는 귀한 딸의 딸인 데다 주말이면 할머니 곁에서 뒹굴며 시간을 보내는 손주라 그런지 할머니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는 어머니 눈을 피해 허리춤에 매단 작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주기도 하고, 조르면 조르는 대로 옛날이야기를 줄줄 들려주셨다. 밥때가 되면 냉동실에서 꼿꼿해진 굴비를 꺼내 찌거나 구우셨다. 조기와 굴비는 당시에도 값비싼 먹을거리였다. 제사 때마다 반질반질한 조기가 상에 올랐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몇 점씩 나눠 먹으면 금세 동이 나 실컷 맛보기가 어려웠다.

    머리 위 다이아몬드 문양 또렷해야 ‘참조기’

    해풍에 조기를 말려 만드는 굴비. [사진 제공·김민경]

    해풍에 조기를 말려 만드는 굴비. [사진 제공·김민경]

    조기는 민어과 물고기로 참조기(황석어), 부세, 보구치(백조기), 흑조기 등 종류가 꽤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른 손바닥만 하고 값비싼 생선이 참조기다. 부세는 참조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크고 살집이 많으며 몸매가 비교적 넙데데하면서 색도 다소 어두운 편이다. 참조기와 부세를 정확히 구분하고 싶다면 머리 위쪽의 눈 사이와 꼬리 모양을 보면 된다. 눈 사이에 다이아몬드 문양이 또렷하며 꼬리지느러미가 펼친 부채처럼 가지런하지 않고 마구 갈라져 있는 것이 참조기다. 

    백조기는 부세보다 크면서 주둥이가 뾰족하지 않고 둥글며 등은 은회색, 배는 은백색으로 참조기와 확실하게 구분된다. 흑조기는 부세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가 더 크고 입 주변은 짙은 회색에 몸 색깔은 검붉다. 어린 참조기는 통째로 절여 젓갈로 만든다. 여러 종류의 조기 가운데 맛과 식감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이 참조기다.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다. 조기는 서해와 제주 바다 등에서 잡히지만 포획된 지역보다 어디에서 염장 및 건조됐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굴비를 생산하는 곳은 전남 영광 법성포다. 영광은 예로부터 좋은 천일염이 생산되며, 차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 생선을 자연 건조시키기에 적합하다. 

    영광에서는 조기의 양쪽 아가미를 벌린 뒤 천일염을 뿌려 재운다. 큰 조기는 입을 벌려 천일염을 좀 더 넣는다. 천일염은 1년 동안 간수를 빼 습기가 없고 결정이 또렷하며 색이 희고 깨끗한 것을 쓴다. 간한 조기를 켜켜이 쌓아두면 물이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간이 더 잘 밴다. 이런 방식을 ‘섶간’이라고 한다. 요즘은 조기 크기가 작아 섶간보다 조기를 통째로 천일염에 살살 버무려 바로 짚으로 엮는 방법을 쓴다. 크기가 크면 10마리를 엮어 ‘오가’라 부르고, 작으면 20마리를 엮어 ‘장줄’이라 한다. 



    단단히 엮은 굴비는 해풍에 말린다. 말리는 동안 조기의 등이 굽는데 이를 보고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건조 기간을 짧게 해 바로 냉동하면 반건조조기처럼 먹기 수월한 일반 굴비가 되고, 해풍에 오래 말리면 살이 훨씬 단단한 굴비가 된다. 일반 굴비는 굽고, 찌고, 양념에 조리고, 칼칼하게 매운탕을 끓이는 등 다양하게 먹는다. 살만 발라 전을 부치기도 하지만 요즘 굴비는 크기가 작아 그대로 구워 먹는 편이 훨씬 낫다. 완전 건조된 굴비는 북어처럼 방망이로 두들겨 부드럽게 만든 뒤 통째로 쪄 먹는다. 바싹 마른 굴비의 살을 발라 고추장에 박아두면 귀한 고추장굴비가 된다.

    녹찻물 밥에 보리굴비 한 점

    부세로 만든 보리굴비. 살이 통통해 먹을 것이 많고 풍미도 좋다. [사진 제공·김민경]

    부세로 만든 보리굴비. 살이 통통해 먹을 것이 많고 풍미도 좋다. [사진 제공·김민경]

    참조기로 만든 굴비는 몸통 길이가 15cm 내외이며 몸매가 날렵하고 배 부분이 카스텔라처럼 노르스름한 빛이 돈다. 살이 보드랍고 짠맛도 부드럽지만 값이 비싸고 양이 너무 적다. 이런 아쉬움을 달랠 만한 것이 부세굴비다. 잘 마른 부세굴비는 통통한 살이 건조 과정을 거치면서 단단해져 식감이 쫄깃하고, 소금 간도 속속들이 배어 그 자체로 충분히 맛있다. 특히 부세굴비로 만든 보리굴비는 조기 요리로 최고인 것 같다. 

    보리굴비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탄생한 음식이다. 굴비와 보리를 번갈아 켜켜이 쌓아 보관하면 굴비가 상하지 않으면서 곰삭은 풍미가 생긴다. 배릿하지만 군침이 도는 향이 나고 맛도 풍성해진다. 

    밥 반찬으로 최고인 보리굴비. [사진 제공·김민경]

    밥 반찬으로 최고인 보리굴비. [사진 제공·김민경]

    보리굴비의 독특한 비린내를 잡고 가볍게 불리기 위해 쌀뜨물에 잠시 담갔다 요리한다. 등, 옆면, 배, 꼬리에 있는 지느러미를 깔끔하게 잘라 내고 비늘을 살살 긁어낸다. 이것을 김이 오른 찜기에 넣고 찐다. 이때 대파나 생강 등을 두툼하게 썰어 찜기 밑바닥에 깔기도 한다. 한 번 찐 보리굴비는 석쇠나 프라이팬에 지지듯 살짝 구워 낸다. 충분히 쪄서 그대로 먹어도 되지만 한 번 더 구우면 표면에 기름이 자르르 돌면서 풍미와 식감이 훨씬 좋아진다. 보리굴비 살을 큼직하게 찢어 뜨거운 밥에 올려 먹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김치와 밑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보리굴비 앞에서는 무색할 뿐이다. 

    녹차에 밥을 말아 보리굴비를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사진 제공·김민경]

    녹차에 밥을 말아 보리굴비를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사진 제공·김민경]

    녹찻물에 밥을 말아 보리굴비 한 점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말자. 짭조름한 살코기와 녹찻물, 밥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 입안에서 비린 맛이 말끔히 사라진다. 잘 삭은 보리굴비로 조림이나 국물 바특한 찌개를 끓여도 맛있다. 꼬들꼬들하게 쪄서 살만 발라낸 다음 미나리나 참나물처럼 향이 좋은 채소와 함께 초고추장에 무쳐 내면 막걸리 생각이 절로 난다. 참조기보다 부세로 만든 보리굴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먹을 것도 많지만 살이 통통해 곰삭은 맛이 훨씬 풍성하게 깃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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