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독립법인대리점(GA· General Agency)들이 3월을 맞아 보험설계사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GA는 한 보험사에 속하지 않고 여러 보험사의 상품을 파는 대리점을 말한다. GA업계에서 3월은 사실상 신사업연도를 시작하는 달로, 실적 좋은 설계사를 얼마나 영입하느냐에 따라 한 해 농사가 좌우된다.
하지만 문제는 GA의 과도한 스카우트 경쟁으로 ‘철새 보험설계사’가 늘어나면서 그 피해가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철새 보험설계사들로 인해 ‘불완전판매’가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의 잦은 이동으로 ‘고아’계약자도 속출하는 상황이다. 고아계약은 보험계약을 모집한 설계사의 이직이나 퇴직 등으로 계약자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다.
2월 17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낸 ‘철새 보험설계사의 문제점과 향후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1년간 회사를 그만둔 설계사 중 2016년 말까지 보험사 및 GA로 3회 이상 이동한 인원은 총 1만6547명으로 회사를 이동한 전체 인원의 20.3%에 달한다(표 참조).
보험 해약 노하우까지 알려주는 설계사들
과거에는 보험사와 대리점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던 반면, 최근에는 대형 GA 간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유는 과도한 수수료 지급에 있다. GA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보험계약 수당을 보험사의 2배 수준으로 제시하는 대형 GA가 늘고 있는 것. 심지어 월초 보험료의 1000%까지 지급하는 GA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당만 좇아 여기저기로 회사를 옮겨 다니는 것이다.
보험업에 정통한 업계 한 관계자는 “영업력이 좋은 설계사는 보통 자기 밑으로 설계사 여러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이동한다. 그 조건으로 스카우트 비용을 더 받기도 한다. 적게는 직전 연봉의 50%에서 많게는 150%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 대신 회사는 새로 영입하는 설계사와 일종의 옵션 계약을 체결한다. 스카우트 비용으로 한꺼번에 큰 금액을 받은 대신 매달 올려야 하는 실적이 정해지는 것. 업계 관계자는 “이직비로 1억 원을 받았다면 매달 영업실적 300만 원을 채워야 하는 식이다. 일부 회사는 아예 스카우트 비용 지불에 따른 보증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결국 설계사는 이미 받은 돈이 있으니 무조건 계약을 많이 하려고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이런 행태는 불완전판매의 단초를 제공한다. 당초 GA 도입 취지는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제공해 불완전판매를 줄이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선 거꾸로 가고 있다. 대형 GA에서 설계사로 활동했던 김모 씨는 “고객은 뒷전이고 오로지 계약 건수에만 혈안이 된 설계사가 많다. 회사와 약속한 실적이 있으니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 말했다.
철새 보험설계사들의 ‘승환계약’으로 피해를 입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 승환계약은 기존에 들었던 보험을 해약하고 다른 보험으로 갈아타는 것을 말하는데, 보험계약 중도해약에 따른 금전 손실, 새로운 계약에 따른 면책기간 신규 개시 등 보험계약자에게 부당한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어 엄격히 제한된다. 하지만 설계사는 승환계약으로 수수료를 챙기려고 기존 계약자에게 첫 달 보험료를 대신 내주는 조건 등으로 승환계약을 종용하고 있다. 심지어 고객에게 기존 보험을 해약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하는 설계사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설계사로부터 승환계약을 요구받았다는 최모 씨는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 불완전판매를 당했다고 항의하면서 ‘해약을 안 해주면 금융감독원(금감원)에 민원을 넣겠다’고 협박하면 된다고 하더라”며 황당해했다.
실제로 보험사는 금융당국에 불완전판매 및 불공정거래 등으로 기록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부분 계약을 해약해준다고 한다. 보험사 한 관계자는 “보험을 판매하던 설계사마저 불완전판매를 인정하고 나서면 보험사가 해약 요청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보험 판매 미끼 삼아 고율 수수료 요구
2000년대 초 국내에 처음 도입된 GA는 지난 몇 년 동안 빠른 속도로 몸집을 키웠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GA 소속 설계사 수가 보험사 전속 설계사 수를 뛰어넘었다. 생명보험협회와 손해보험협회가 국회입법조사처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12월 GA 설계사는 20만8999명이었는데 보험사 전속 설계사는 19만6796명에 그쳤다. 설계사를 3000명 이상 보유한 대형 GA 수도 12개에 달한다. 또한 금감원에 따르면 2015년 6월 말 기준으로 전체 보험사 판매 실적(생명보험은 가입자가 첫 달에 내는 보험료, 손해보험은 보험사가 거둬들이는 전체 보험료 기준) 중 GA의 실적은 8조6000억 원으로 전체 38.1%를 차지했다. 특히 손해보험사들의 GA 의존도가 전체 실적 19조2000억 원 가운데 8조4000억 원으로 44%에 가까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험사와 GA의 ‘갑을관계’가 역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업망을 장악한 GA가 보험사에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자사 판매만 가능한 상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것. 한 대형보험사 관계자는 “대형 GA가 보험사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다 보니 해당 GA에게 자사 상품을 좀 더 많이 판매해달라고 점점 ‘애원’하게 된다”고 푸념했다.
심지어 일부 GA는 설계사 상품교육 자료에 해당사가 만든 상품을 넣어주는 조건으로 비품, 회식비 등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고, 추가 시책(특별수당 개념으로 현금 또는 선물·상품권)을 주면 월말까지 해당 상품을 목표치까지 팔아주겠다는 식으로 ‘반(半)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 대형 GA 대표는 보험사 임원을 ‘벗겨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갑자기 부부 동반 골프라운딩을 가자고 한 뒤 그린피는 물론, 밥값까지 모두 떠넘긴다. 그 대표한테 당한 보험사 임원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국내 대형보험사 대부분이 대형 GA의 사무실 임차비용을 대신 내주고 있다. 그 대신 GA는 보험사로부터 ‘임차 책임액’을 달성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보험사로부터 임차료를 지원받는 대신 매월 팔아야 하는 할당량이 정해지는 것. 현재 대형보험사 기준으로 전체 매출에서 임차 책임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60%에 육박한다. 그만큼 보험사가 GA 사무실 임차료로 지출하는 비용도 크다는 얘기다. 하지만 4월부터는 금융당국의 제재로 더는 이런 관행이 불가능해진다.
최근 있었던 메리츠화재와 GA의 설계사 수당 갈등도 GA가 보험사에 얼마나 압력을 가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7월 메리츠화재는 자사 전속 설계사 채널의 영업력과 동기 부여를 강화하고자 설계사의 수수료를 월납 보험료의 1000%로 전격 인상했다. 이에 GA가 즉각 반발하며 조직적으로 메리츠화재 상품 불매운동에 나서자 메리츠화재는 GA에게도 성과급을 주는 것으로 갈등을 매듭지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험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보험사부터 과도한 유인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보험사 한 관계자는 “영업의 기본이 인센티브이긴 하지만 적정 수준은 분명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보험사 간 긍정적인 ‘담합’이 필요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보험사든, GA든 모두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경쟁을 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한국보험대리점협회 관계자는 “2013년 선지급수수료 제도가 사라지는 등 수수료 문제는 어느 정도 투명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한다. 일부 설계사의 잦은 이동 내지 불완전판매 같은 문제가 전체의 얘기처럼 여겨지는 건 부담스럽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철새 보험설계사 및 고아계약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수수료 체계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창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자사 설계사에게는 500~600%의 보험모집수당을 주면서 GA 설계사에게는 1000~1200%나 되는 수수료를 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과도한 수수료는 곧 보험료 상승으로 소비자에게 부담을 안기는 만큼 적정 수준으로 낮출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김 조사관은 설계사의 잦은 이동을 막으려면 모집경력조회시스템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계사 영입 시 모집경력조회시스템을 활용해 이동 횟수와 불완전판매 이력 등을 확인하고 이를 위촉심사기준에 반영해 조회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금감원 출신 낙하산 인사 횡행
한편 승환계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험 유지율’이 높은 설계사에게 적정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보험사와 GA가 설계사에게 신규 가입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한 고객이 얼마나 오랫동안 보험을 유지하는가에 따라 보상 정도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 보험사 한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설계사의 역량 중 고객관리 부분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무조건 눈앞의 성과에만 연연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결국 소비자, 설계사, 보험사 모두에게 해가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4월부터 GA 설계사는 소비자에게 보험상품을 3개 이상 비교해 설명하는 ‘상품비교설명제’를 시행해야 한다. 지난해 말 금융위원회는 보험상품의 불완전판매를 줄이고 GA 본연의 기능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이 같은 내용의 ‘보험업감독규정’ 개정안을 확정했다. 하지만 보험업계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보험사 한 관계자는 “현재도 각 보험사에서 GA에 매니저를 파견해 가입 설계서를 대리로 설명해주고 자료도 산출하는 경우가 많다. 베테랑 설계사가 아니고서는 모든 보험사의 상품을 완벽히 알기 어려울 것이다. 보험 판매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GA 자체적으로 설계사 교육프로그램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GA 설계사가 상품비교설명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더라도 이를 처벌할 규정은 따로 있지 않다. 김창호 입법조사관은 “권고사항에 불과할 뿐 GA 설계사의 역량이 높아지지 않는 한 무용지물에 그칠 수밖에 없다. 특히 금감원은 GA를 관리·감독해야 하는 기관임에도 현재 대형 GA에 소속된 감사나 임원 등 대부분이 금감원 출신이라 GA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상품비교설명제를 위반한 횟수에 따라 행정적 제재가 분명히 가해질 것이다. 금감원 출신이 GA에 영입되는 건 업계 전문가로서 당연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