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주 나파 밸리(Napa Valley)의 ‘끌로 뒤 발(Clos du Val)’ 와이너리. 끌로 뒤 발은 프랑스어로 ‘작은 계곡의 작은 포도밭’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나파 밸리가 미국 최고 와인 산지지만, 끌로 뒤 발을 설립한 1970년대 초에는 인지도가 낮았으니 작은 계곡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끌로 뒤 발의 작은 시작은 나파 밸리의 오늘을 만들어낸 큰 사건이었다.
끌로 뒤 발 설립자인 존 고엘렛(John Goelet)의 외가는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와인을 만들던 집안이다. 와인 생산자의 피를 이어받은 고엘렛은 보르도 못지않게 좋은 조건을 갖춘 땅을 찾고자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러다 그는 프랑스 출신 와인메이커 베르나르 포르테(Bernard Portet)를 만났다. 뜻이 통한 둘은 금방 친구가 됐고, 함께 나파 밸리의 스태그스 립(Stags Leap) 지역을 찾아냈다. 한낮에는 태양이 뜨겁고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스태그스 립이야말로 훌륭한 포도를 길러낼 천혜의 땅임을 알아본 것이다.
둘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들이 스태그스 립에서 1972년 생산한 첫 와인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 76년 파리 시음회 출품 와인으로 뽑힌 것이다. ‘파리의 심판’이라고도 부르는 이 시음회는 보르도의 빛나는 별 같은 와인 4종과 나파 밸리의 신생 와인 6종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품질을 겨룬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시음회에서 나파 밸리 와인이 1위를 차지하자 나파 밸리는 단숨에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등극했고, 프랑스 와인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정확히 10년 뒤인 86년 똑같은 와인으로 재대결이 펼쳐졌다. 보르도 와인의 특성상 시간이 흘러 와인이 숙성되면 훨씬 더 맛있으므로 보르도가 승리할 거라고 많은 이가 예상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나파 밸리 와인이 또다시 1, 2위를 차지했고 1위가 바로 끌로 뒤 발 카베르네 소비뇽 1972년산이었다.
얼마 전 출시된 끌로 뒤 발 카베르네 소비뇽 2014년산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이다. 과일향의 집중도가 좋고 타닌이 힘차면서도 매끄럽다. 긴 여운에서는 초콜릿과 라즈베리향이 맴돈다. 최근 방한한 스티브 탬부렐리(Steve Tamburelli) 끌로 뒤 발 대표이사에게 2014년산의 맛이 40여 년 전 1972년산이 보여준 맛과 비슷한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당시 와인은 섬세한 보르도 스타일에 가깝고, 지금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진하고 묵직한 맛이 많다고 답했다. “미국인은 자동차 트렁크에서 와인을 숙성시킨다고들 합니다.” 그가 농담처럼 한 말이다. 싣고 가는 동안만 잠시 기다릴 뿐 미국인은 와인을 사면 숙성 없이 바로 마신다는 뜻이다. 그는 “끌로 뒤 발 와인은 보르도와 나파 밸리의 중간쯤”이라며 “어릴 때 마셔도 좋지만 숙성되면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고 역설했다.
와인은 어떤 면에서 영화와 닮았다. 잔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농익은 과일향으로 매료시키는 나파 밸리 와인이 흥미진진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면, 오랜 숙성을 요하는 까다로운 보르도 와인은 진지한 프랑스 예술 영화 같다. 그렇다면 끌로 뒤 발 카베르네 소비뇽은 예술성 있는 할리우드 영화일까. 이 와인이 숙성되면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하다. 한 병 사서 셀러 깊숙이 넣어두고 묵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