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미국이 B-1B 초음속 폭격기를 괌 기지로 전진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힌 뒤 북한은 이렇다 할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사실 미 공군이 이르면 6일 미 본토 사우스다코타 주 엘즈워스 기지 소속 초음속 폭격기인 B-1B 편대를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 전진 배치키로 한 것은 군사적 의미와 함께 정치적 의미도 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B-1B 초음속 폭격기는 B-52 전략폭격기, B-2 스텔스폭격기와 함께 미군의 ‘3대 핵폭격기 전력’으로 꼽힌다. 비행속도와 무기 탑재량이 B-52 전략폭격기를 능가한다. 유사시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한국 서울까지 3200km를 날아온다면 B-52 전략폭격기는 3시간 걸리지만 B-1B 초음속 폭격기는 2시간이면 가능하다. 탑재용량도 31t 대 56t으로 2배 가까이 된다. 한마디로 이번 조치는 미국이 동맹국 한국에 보장하고 있는 핵우산을 포함한 핵 확장억제능력을 크게 강화한다는 군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에 북한은 8월 3일 오전 황해도 은율군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노동미사일 2발을 발사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B-1B 초음속 폭격기의 괌 배치가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고 싶은 북한에게 명분이 됐는지도 모른다.
북·미관계, 레드라인이 무너지고 있다
과거 남북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북·미관계에도 일정한 리듬이 있다. ‘강(强) 대 강(强)’으로 맞붙다 서로가 인정하는 레드라인에 이르면 냉정을 되찾고 휴지기에 접어들기를 반복한다. 문제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싸움 강도가 점점 세지고 기존 레드라인이 무너지면서 고점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미국 전략폭격기인 B-2와 B-52 등이 한반도 상공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것은 북·미 간 싸움이 레드라인에 근접했음을 뜻해왔다. 실제로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이라는 도발을 감행한 김정은은 미국과 한국을 대상으로 비난과 위협 수위를 높여가다 2월 27일 한미연합 군사연습인 ‘키리졸브’의 시작을 계기로 도를 넘어섰다. 즉 아버지 김정일도 생전에 쓰지 않던 ‘미국 본토 타격 위협’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에 미국은 훈련기간 중인 3월 19일 한반도 상공에서 B-52 전략폭격기 비행훈련을 하는 것으로 무력시위를 했다.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출발한 B-52 전략폭격기는 한반도 상공을 선회한 뒤 복귀했다. ‘하늘을 나는 요새’라 부르는 B-52 전략폭격기는 정밀조준이 가능한 재래식 무기는 물론,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공중발사순항미사일(ALCM)도 탑재할 수 있다. 미군은 한미연합 ‘독수리훈련’ 기간 중이던 3월 28일 또 다른 전략폭격기인 B-2 스텔스폭격기 2대를 한반도에 보내 폭격훈련을 실시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김정은은 3월 29일 자정이 넘은 시간에 군 최고 수뇌부를 긴급 소집해 작전회의를 열고 군 전략로켓부대에 ‘사격 대기 상태’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조선중앙TV를 통해 자신이 미국 수도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또는 샌디에이고), 하와이, 오스틴 등 타격 지점 4곳이 명시된 ‘미국 본토 타격 계획’ 지도 앞에서 장군들을 지휘하는 장면을 내보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2013년 일이다. 그러곤 3년을 잠잠히 지냈다.
北,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 막바지
1월 6일 북한이 4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미국은 나흘 뒤인 10일 또다시 괌에 있던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으로 출격시켰다. 북한이 2월 7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자 미군은 열흘 뒤인 17일 최첨단 스텔스전투기 F-22(랩터) 4대가 한반도 상공을 비행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했다. 8월 중 B-1B 초음속 폭격기를 괌 기지에 전진 배치하는 것은 그 후속조치라 할 수 있다.이처럼 미군이 폭격기를 띄워 북한에 무력시위를 하는 것은 6·25전쟁 당시 미군 B-29 폭격기에 국토 전체가 파괴됐던 북한의 ‘폭격 트라우마’를 활용한 심리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9일 미 극동공군 산하 제3폭격전대의 평양비행장 폭격으로 시작된 미군의 폭격은 3년 뒤 휴전 때까지 북한 김일성 등 지도부와 인민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당시 미군 폭격을 집중 조명한 김태우 박사의 ‘폭격’(창비/ 2013)에 따르면 북한은 1999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편지에서 전쟁 당시 미군이 주민 190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소련의 54년 보고서가 적시한 28만2000명에 비해 크게 부풀려진 숫자지만, 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이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것만은 틀림없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 평양 주석궁 인근에 깊은 땅굴을 파고 ‘방공’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에게 등화관제 훈련과 공습대피 훈련을 철저히 시킨 것도 바로 전쟁 당시 속수무책으로 미군 폭격에 당한 뼈저린 기억 때문이었다. 2013년 4월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공개한 루마니아의 북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1968년 1월 23일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직후 평양주재 외교관들을 불러 모아 “미국의 공습이 예상되니 대사관에 방공 참호를 파라”며 심리전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B-1B 초음속 폭격기의 전진 배치를 정치적으로 보면, 북한이 최근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고 한국을 겨냥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에 열중하는 모습을 미국 측이 한미동맹에 대한 엄중한 안보상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한반도는 물론, 괌과 사이판 등 미국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들 중거리 미사일 개발에 미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향후 B-1B 초음속 폭격기가 실제로 한반도 상공에서 훈련할 경우 북한은 또다시 말과 행동으로 강력히 반발할 것이다. 이번엔 ‘미국 본토 타격 계획 지도’로는 성에 차지 않을 테니, 가짜 핵탄두라도 장착한 장거리 미사일 보여주기 카드를 쓰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한반도에 B-1B 폭격기를 보내는 데 얼마나 드나? 비용은 한국이 내나?” ▼
미군이 북한의 계속되는 본토 공격 위협에 B-2 스텔스폭격기 2대를 한반도에 전개한 2013년 3월 28일 오후. 당시 척 헤이글 미 국방부 장관은 이례적으로 펜타곤 주재 기자들의 정례 브리핑에 직접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전년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재임에 성공하고 민주당과 공화당 등 워싱턴 정계가 재정절벽 및 국방비 삭감 문제로 논쟁을 벌이던 때다.
아니나 다를까. 한 미국 기자는 “한반도에 B-2 스텔스폭격기를 보내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나. 재정위기 상황 속에서 적절한 일이었나”라고 삐딱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헤이글 장관은 “정확한 액수는 모른다”고 선을 그은 뒤 “한반도와 한미동맹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이라고 설명했다. 함께 나온 마틴 뎀프시 합동참모본부 의장도 “예산에 책정된 군사훈련 비용 안에 있다”며 “문제될 것이 없다”고 헤이글 장관을 방어했다.
헤이글 장관은 한미연합 군사연습에 따른 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이 커지는 데 대해 “북한의 위협이 커지고 있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 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북한의 어떤 예측 불허 사태에도 대처할 준비가 돼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우리는 절대적으로 한국과 이 지역의 다른 동맹을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기자의 삐딱한 질문은 한국이 자국 방어를 위해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미국 하층민들의 정서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일화였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가 실제로 대통령이 된다면? 북한의 도발에 B-1B 초음속 폭격기를 전개하자는 국방부의 제의에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한반도에 B-1B 초음속 폭격기를 보내는 데 돈이 얼마나 드나? 비용은 한국이 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