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가 펴낸 2015 회계연도 정부 예산 집행 명세를 검토한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지난해 ‘해외 의료관광객을 유치하겠다’며 예산 48억9000만 원을 집행해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중국, 일본, 필리핀, 러시아, 카자흐스탄, 말레이시아 등을 돌며 6억 원을 들여 의료관광 설명회를 개최했고, 중국 어린이 환자를 초청해 나눔의료관광을 추진하는 해외나눔의료 홍보활동 명목으로 1억 원을 썼다. 또한 의료관광을 위한 통합 온라인 플랫폼 구축 명목으로 예산 7억 원을 들여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로 된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했다. 보건복지부(복지부)도 비슷한 목적으로 예산을 집행했다. 우리나라 의료서비스 수준을 알리는 적극적인 홍보와 마케팅으로 ‘외국인 환자를 국내에 유치하겠다’며 예산 39억3600만 원을 배정받았다. 국제의료콘퍼런스 개최와 한국의료 홍보행사 지원 명목으로 8억5000만 원을, 그리고 카자흐스탄, 러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해외 의료기관과 환자 송출 네트워크 구축 명목으로 4억7000만 원을 썼다. 중국 환자 2명 등 해외 저소득층 환자를 초청해 치료 성공 사례를 홍보하겠다는 명목으로 8억1700만 원을 사용했고, 한국의료기술을 해외에 알리겠다며 ‘메디칼 코리아’ 다국어 홈페이지 구축비용으로 8억 원 이상 예산을 집행했다. 복지부가 해외 마케팅을 위해 홈페이지를 구축한 다국어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문체부가 구축한 다국어와 똑같다.
문체부는 ‘의료관광 육성’이라며 ‘관광’을 앞세웠고, 복지부는 ‘해외환자 유치 활성화 지원’이라며 ‘해외환자’를 강조하고 있지만 두 사업은 추진 주체와 사업 명칭만 다를 뿐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375조 원(2015년 기준) 넘는 예산을 편성해 집행하는 정부 사업 가운데는 이처럼 내용이 유사하거나 중복된 것이 적잖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문체부는 ‘크루즈관광 산업’의 전략적 육성 및 해외 크루즈관광객 유치 증대를 이유로 2015년 예산 8억3200만 원을 편성, 집행했다. 해외 크루즈관광 설명회에 7500만 원, 홍보물 제작에 5000만 원, 크루즈 여행업계 대상 초청 팸투어에 3000만 원, 크루즈관광 포럼 개최에 7000만 원을 썼다. 이에 질세라 해양수산부도 ‘크루즈 산업 활성화 지원’을 목적으로 예산 9억5000만 원을 편성, 별도로 집행했다. 해외 크루즈관광객 유치 설명회에 2억 원을 썼고 정부 관계자, 선사 및 여행사 관계자 팸투어에 1억 원, 제주국제크루즈박람회 개최에 3억 원을 썼다.
문체부는 사업명에 ‘관광’을 넣어 자기 부처 사업임을 강조했고, 해양수산부는 ‘산업 활성화’라며 산업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사업 내용은 판박이다. 크루즈가 해양에서 운행된다는 점을 빼면 ‘관광객’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하고 ‘여행사 관계자’를 팸투어 행사에 초청하며 ‘박람회’를 여는 일을 꼭 해양수산부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정부가 지난 한 해 돈을 어디에 얼마만큼 썼는지, 예산을 집행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는지를 따져보는 과정이 국회의 결산심사다. 나라 살림의 잘잘못을 제대로 따져보는 일은 곧 다음 해 어떻게 살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즉 제대로 된 결산 자료는 효율적 예산 편성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 결산심사는 형식적 절차에 그쳐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국회예산정책처에서 수백 쪽에 달하는 분석보고서를 펴내고, 각 상임위원회(상임위)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결산심사 보고서를 작성하며, 예결위에서도 수천 쪽에 달하는 자료를 쏟아내지만 의원들이 결산심사를 위해 상임위에 투자하는 시간은 1년 중 고작 며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법률소비자연맹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국회 16개 상임위 가운데 정보위를 제외한 15개 상임위의 예결산심사소위원회 평균 회의시간은 75시간 15분으로 조사됐다. 380조 원 넘는 막대한 예산에 대한 결산심사를 진행하는데 고작 사흘 정도 시간밖에 투자하지 않는 셈이다.
사드에 치이고, 우병우에 묻히고
20대 국회도 예외는 아니다. 7월 중순 상임위별로 결산심사를 위한 회의를 몇 차례 열었을 뿐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집행을 따져 묻고자 끈기 있게 결산심사에 매달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국회 결산심사가 부실한 가장 큰 원인으로 ‘이미 쓴 돈의 잘잘못을 따져 무엇하겠느냐’는 의원들의 태도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양경숙 한국재정정책연구원장은 “국회 결산심사에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다”며 “하나는 이미 써버린 결과에 대한 심사라는 점에서 관심이 적고, 또 하나는 잘못 쓴 것을 밝혀내도 제대로 처벌을 요구할 수 없어 의욕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예산안 심의가 ‘삭감’을 통한 견제와 정부 예산에 대한 감시·감독 기능이 강한 반면, 결산심사는 삭감이나 증액 없이 ‘잘 집행했는지’ 점검하는 차원에 머물러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논란과 우병우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둘러싼 의혹, 양당 전당대회 준비 등으로 결산심사가 더욱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결산심사 부실은 곧 부실한 예산심의로 이어진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해 예산안 심의에 들어가면 또다시 비효율적 예산 배정이 답습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대 국회에서는 부실하게 운영되는 국회 결산심사를 개선하기 위한 법 개정 노력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경기 수원정)이 국회법과 국가재정법, 국가회계법 등 결산 관련 법안 5건을 대표 발의한 것. 법안 발의 당시 박 의원은 “결산의 실효성을 확보하고 심사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하려면 결산심사 보고서를 국회 승인 대상으로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결산심사 강화를 위한 이 법안들은 의원들의 무관심 속에서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폐기됐다.
국회에서 결산심사가 유명무실해진 사이 우리나라 국가 채무는 해마다 큰 폭으로 늘고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국가 채무는 590조5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57조3000억 원 늘었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37.9%에 이르는 규모로 2014년보다 2%p 상승한 수치다. 정부의 예산안 심의권을 가진 국회가 철저한 결산심사를 바탕으로 낭비적 요소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면 결국 후대에 큰 부담을 떠넘기는 셈이 된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해 나라 살림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