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 초반이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대통령 임기 후반과 지지율 하락, 압도적 여소야대 국면은 입법부 우위의 필요충분조건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회는 지금 주춤거리고 있다. 정치적 기반이 강한 정세균 국회의장이 일성으로 개헌 추진을 언급하고, 청와대와 여당에서도 ‘협치’를 강조할 때만 해도 여의도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국민의당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서영교 의원으로부터 촉발해 여야 모든 정당으로 불똥이 튄 ‘갑질-특권’ 논란, 일부 초선의원의 헛발질이 한 달여 동안 이어졌다.
같은 기간 신공항 공약 파기 논란, 청와대 행정관의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연루 의혹, 정운호발(發) 법조게이트, 청와대 서별관회의 논란, 세월호 보도 개입 의혹 등 정부가 궁지에 몰릴 만한 현안 역시 줄줄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국회의원 때리기’가 유행이 됐을 정도다. 지금 국회는 납작 엎드린 형국이다. 물론 초점은 주로 야당에 맞춰져 있고 보수진영이 ‘국회 때리기’에 앞장선 것도 사실이다.
보수진영의 국회 때리기
예컨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국민의당과 함께 새누리당 이군현, 권석창 의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 의원은 2억4400여만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받고 있고, 권 의원은 불법정치자금으로 의심되는 돈을 수수하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촬영됐다. 하지만 검찰이 이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는 감감무소식이다.하지만 서영교 의원으로부터 시작된 논란은 여야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이 질타했다. 각 당이 전수조사, 진상조사에 한창이지만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더민주 조응천, 표창원 의원이 불러일으킨 논란도 정치적 배후를 의심하기는 어렵다. 본회의 첫 파행의 장본인이 된 국민의당 김동철 의원 관련 사안 역시 상대방인 새누리당 이장우 의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렇다 보니 집안 문제로 머리가 아파 복지부동하다시피 하는 여당에 비해 야당이 질타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후반부터 공을 들이던 입법부 비판이 뒤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현재 국회에 쏟아지는 비판 앞에서 단순히 검찰 탓, 언론 탓만 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잘못, 관행, ‘높은 분’을 향한 감정적 분노, 입법부에 대한 적의가 혼재된 소용돌이 속에서 정당과 의원들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 의정활동에 나선 의원들의 실수도 겹치고 있다.
더민주 한 초선의원은 “초선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조심, 또 조심하고 있다”면서 “언론과 여론에 대해 대놓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불만이 많다. 하지만 내부적 원인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 의원은 “투쟁, 폭로로 대표되는 기존 야당 이미지에서 벗어나 대안 정당으로 자리매김해야 정권 탈환이 가능하다는 공감대는 당내에서 상당한 편인데, 원래 ‘대안 마련’이란 게 어려운 법이고 관성은 그대로 살아 있어 뭔가 전반적인 기조가 잘 안 잡히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여당 의원실 소속 고참 보좌관은 “20대 국회의원 수준이 19대나 18대보다 낮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 “야당이 화살을 많이 맞아서 우리가 숨을 좀 돌리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반적으로 의원들에게 부정적 의미의 자기 검열을 심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일간지의 국회 출입 기자는 “‘어~’ 하다 이렇게 와버렸다”며 “평소 논조가 반영된 면도 없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조지기’ 경쟁으로 흐른 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이 기자는 “사실 진보성향의 독자든, 보수성향의 독자든 국회의원 비판 기사에는 거부감이 별로 없다. 이쪽은 이렇게 때리고 저쪽은 저렇게 때리다 보니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이 관심을 갖는 사안은 금방 바뀌기 마련이고, 이달 중순이면 각 당 전당대회 국면이 본격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입법부에 대한 전반적 신뢰 저하는 다양한 정치적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일단 대권주자군이 국회와 거리를 두고픈 유혹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국회나 당과 떨어져 이미지를 관리하고 바닥 조직을 다지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국회와 거리 두고픈 유혹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는 의원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일찌감치 여의도에서 발을 뺀 상태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 역시 대표직에서 사임하면서 지지율이 반등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도 여의도와 떨어져 있으려 한다.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두 사람 다 여의도와 거리를 둔 별도 플랜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원순, 안희정, 남경필, 원희룡 등 현직 광역단체장 처지에서도 국회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당에 기반을 둔 정치인이 과도하게 여의도와 떨어져 있거나 오히려 국회 때리기에 동참한다면 부메랑 효과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이런 식의 경쟁이 펼쳐진다면 제일 유리한 사람은 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일 것이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최근 대통령들은 의도했든, 안 했든 당이나 현역의원들과 유리된 이미지를 구축해 당선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공조직보다 지지자 조직이나 측근에게 더 힘을 실어줬다는 비판을 받았고, 당선 후에는 냉온탕을 오가는 당청관계 속에서 국정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약한 정당, 입법부에 대한 낮은 신뢰는 장기적으로 상당히 큰 부작용을 낳게 된다는 뜻이다.
다른 측면도 있다. 입법부, 개별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 저하가 지속된다면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이른바 분권형 개헌론은 조기에 동력을 상실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분권보다 ‘나눠 먹기’ ‘기득권 공유’라는 측면이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경험이 많은 원로·중진의원들이 전면에 나설 경우 부정적 이미지는 더 심화될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개헌 실현의 근본적 동력은 ‘변화’와 ‘쇄신’에 대한 국민의 기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20대 국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초반 위기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잊어야 하는 건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경구다. 남 탓이나 강성 지지자들의 결집은 탈출구가 아니라는 점은 최근 한국 정치사가 이미 증명했다. 진부하지만 특권, 갑질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 수립, 국회윤리위원회의 실질적 강화 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행정부 견제, 입법활동 강화 등 국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만이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