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만 하면 고생이 끝날 줄 알았는데 매일 강의실에서 피곤한 얼굴로 마주치는 직장인들을 보면 취업해도 지금 같은 일상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만 답답해집니다.”
매일 새벽 토익학원을 다니는 취업준비생 양모(26·대학생) 씨는 최근 학원생의 연령대가 점점 올라가 당황스럽다. 대학 졸업반이나 취업준비생이 대부분이던 새벽반에 직장인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 양씨는 “학원을 꽉 채운 수강생의 절반이 직장인이다.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정장 차림 직장인들과 함께 아침 수업을 듣는다. 처음 온 다른 학생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강의실 풍경에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의 압박으로 낮엔 일하고 밤과 새벽에 공부하는 ‘샐러던트’(salaryman과 student의 합성어)와 여가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는 투잡족이 크게 늘고 있다. 직장인 10명 중 6명이 학원을 다니거나 온라인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으며 그중 1명은 현재 다니는 직장 외 따로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명은 ‘기회만 된다면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잘릴까 봐 공부하는 강박증
일하면서 공부하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상징으로 2009년 만들어진 조어 ‘샐러던트’. 하지만 요즘 그 개념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초기 샐러던트가 현재의 직장생활 외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학위를 따거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면, 지금의 샐러던트는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2014년 인터넷 강사전문 취업포털 강사닷컴이 전국 20대부터 60대까지 남녀 98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 시점 전 1년간 학원을 다니거나 온라인교육을 수강한 경험이 있는 직장인이 62.2%에 달했다. 직장인이 업무시간 외 학원 강의를 수강하는 이유는 1위(45.2%)가 ‘스펙 향상’이었고 2위(26.1%)가 ‘미래 재취업이나 이직 준비’였다. 직장인 대부분이 직장에서 살아남거나 원치 않는 퇴직 후 미래를 위해 여가시간을 쪼개 학원을 다니고 있는 것.직장인 한모(30) 씨도 샐러던트족이다. 매주 사흘씩 업무시간이 끝나면 중국어 수업을 들으러 서울 강남 학원가로 향한다. 한씨는 “대학생 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취직하면 더는 어학 공부가 필요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직장생활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서울 본사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지 않으려면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으로 어쩔 수 없이 학원 수강을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샐러던트족 이모(29) 씨는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준비 중이다. 이씨는 “처음 한 달간은 퇴근 후 요리수업을 들었고 지금은 주말반 수업을 들으며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씨가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이유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이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서울 소재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이곳은 처우도, 급여도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회사가 망하거나 잘릴 때에 대비해 자격증 취득 준비를 하고 있다. 여차하면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작은 식당을 차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시 부는 직장인 공부 열풍은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고 밝혔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새로운 지식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는 사회에서 직장인에게 공부란 불안한 미래를 대비할 유일한 대안이자 현재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여가시간에 제대로 쉬지 못하면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는 회사 처지에서도 손해고 크게는 사회적 낭비를 초래한다”고 진단했다.
생계형과 미래 준비형 투잡족
갖은 고생을 하며 취직한 정규직이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고, 또는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려고 아르바이트 시장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도 문제다. 소위 투잡족들. 얼마 전 중소기업 취업에 성공한 박모(27) 씨는 수습사원 3개월 동안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금·토요일 저녁 호프집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박씨가 처음 고용계약을 할 당시 연봉은 2500만 원이었지만 수습 3개월 동안 월급은 각종 수당을 제외한 기본급의 70%인 110만 원(세후) 정도에 불과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는 박씨로서는 월세와 이동통신비, 생활비를 내고 나면 10만 원 안팎의 돈만 쥐어졌다.
박씨는 “취업하면 아르바이트에 치이지 않고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일하던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수습기간이 끝나도 아르바이트는 계속할 예정이다. 결혼이나 전셋집 마련을 생각하면 저축을 해야 하는데 월급이 제대로 나온다 해도 저축하기에는 액수가 적다”고 말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8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0.9%가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 외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통해 돈을 번다’고 응답했다. 하는 일로는 △학원 강사 △매장 운영 △프로그램 개발 △레스토랑·카페 서빙 △우유 및 신문 배달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부터 그렇지 않은 분야까지 다양했다. 투잡으로 얻는 수입은 월평균 125만 원 정도였다. 이 수입 중 70%가 생활비와 저축, 자녀 양육비로 쓰였다.
직장인 김모(35) 씨도 투잡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쌍둥이가 태어나 갑자기 지출이 늘었다. 애가 둘이라 아내가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내가 더 벌어야 한다. 대리운전을 알아보고 있는데 괜찮은 자리가 많지 않다”며 한탄했다. 실제로 ‘사람인’의 설문조사 결과 직장인의 73.8%가 ‘투잡을 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투잡을 하고 싶은 이유로는 ‘월급으로는 생활이 힘들어서’(55.6%·이하 복수응답)가 1위를 차지했고 ‘노후 대비 및 여유자금 확보’(28.2%), ‘빚 청산, 결혼자금, 목돈 마련’(27.2%)이 뒤를 이었다.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하는 직장인의 대다수(87.2%)는 이런 사실을 회사에 숨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에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 않는 이유로는 ‘업무에 소홀해 보일 것 같아서’(57.8%·이하 복수응답), ‘인사평가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26.5%) 등이었다. 회사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생활비나 미래를 준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직장인이 불가피하게 2개 이상 직업을 가지면 직무 몰입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업을 포기하게 하고 직무 몰입도를 높이려면 결국 본직장이 고용보장을 확실히 하고 임금을 올려주는 등 피고용자가 삶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원하는 소득을 얻지 못해 부업을 하는 상황인데 그걸 막는다고 직무 몰입도가 높아지진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