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개봉작 ‘나의 그리스식 웨딩’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프라이버시를 다른 어떤 권리보다 우선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그리스식 가족관계가 매우 색다른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이제 기록에서나 볼 수 있는 끈적끈적한 가족 중심 사회. 그것도 아버지, 어머니, 아이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가문’이라 불러도 되는, 일가족이 똘똘 뭉치는 영화 속 풍경은 가히 낯설고도 기이했을 법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즉 대한민국 사람에게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은 낯설기보다 낯익은 풍경으로 공감을 샀다. ‘그리스인들도 (우리처럼) 저러는구나’라는 공감이 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선사한 셈이다. 막 개봉한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두 번째 이야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북적북적한 가족 코미디다.
1편이 그리스인 주인공 툴라가 비(非)그리스인, 그들 처지에서 보면 외국인과 결혼하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그렸다면, 2편은 어느새 중년이 된 툴라와 남편 이언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의 딸은 너무 자라 굿모닝 키스를 해주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한다. 딸이 대학 갈 때가 되고 보니 엄마 툴라는 그 빈자리가 벌써 두렵다. 영화 속 대사처럼 툴라는 엄마이기 전에 남편 이언의 애인이었지만, 이제 둘은 어느새 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대화가 불가능한 사이가 됐다.
툴라의 가족은 여전히 가족 일이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나선다. 가령 툴라의 딸 패리스가 갈 만한 대학을 알아보는 일에 거동이 불편한 100세 증조할머니까지 나설 정도다. 이모, 삼촌, 조카 할 것 없이 모두 와서 한마디씩 거든다. 하지만 이제 17세가 된 패리스에겐 이런 유별난 가족이 부끄럽고 창피할 뿐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별종으로 분류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영화는 이렇듯 세대 차이와 문화 차이를 보태 그 차이가 주는 온도 차를 웃음의 기원으로 삼는다. 걸핏하면 알렉산더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패리스의 할아버지나 뒤늦게 프러포즈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머니뿐 아니라 섹시한 매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모들, 어쩐지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삼촌들도 웃음 코드 중 하나다. 즉 미국인에게는 낯선 소수민족의 문화가 웃음 소재로 활용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피트니스클럽에 모인 4명의 할아버지가 모두 소수계 이민자인 점은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란에서 온 할아버지는 페르시아계임을 강조하고 중국에서 온 할아버지는 자신들의 조상이 종이를 만들었다며 자긍심을 뽐낸다. 스코틀랜드 출신 할아버지는 페니실린을 만든 사람이 바로 스코틀랜드인이었다고 큰소리친다. 말 그대로 미국에 살고 있는 소수자들의 역설적 자긍심이 영화 전반에 웃음과 온기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 풍경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많이 도시화되고 또 그만큼 개인의 삶이 우선시되는 것은 맞지만, 적어도 결혼만큼은 가족의 일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도 그렇다. 온 가족이 한마디씩 훈수를 두는 장면도 우리에겐 매우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그리스식 웨딩 2’는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기보다 마치 명절에 보는 영화처럼 낯익고 훈훈하다. 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긴장감 없이 감상할 수 있다.
한편 웃음의 원천은 새로움이라는 생각도 지우긴 힘들다. 1편에서는 그리스인의 난리법석이 무척 흥미로웠지만 어느새 그에 익숙해진 만큼 웃음의 강도가 낮아졌다. 역시 울리기보다 웃기는 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