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비사성으로 추정되는 대흑산산성은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진저우에 있는 대흑산(大黑山)에 축조된 성이다. 둘레 약 5km의 대형 산성으로 고구려 천리장성 방어망의 최남단에 자리한 해안 방어 요새였다. 598년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수 문제의 다섯째 아들 한왕 양량과 왕세적이 지휘하는 육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 천리장성 방어망을 공략했고,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은 산둥반도 동래에서 출발해 황해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은 중간에 철군한다. ‘자치통감’은 그 이유에 대해 주라후 수군이 태풍을 만나 많은 배가 침몰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을 물리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하는 윤명철 동국대 교수도 당시 주라후의 수군이 큰 손실을 입고 철수한 원인에 대해 태풍이 아닌 고구려 수군과의 전투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사료에 따르면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이 이동한 것은 음력 6월부터 8월 사이로 이때는 황해 북부, 즉 요동만과 발해만 일대에 태풍이 부는 계절이 아닐뿐더러 여름이라 파도도 높지 않았다. 설령 태풍을 만나더라도 주변에 섬이 많아 충분히 대피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풍으로 철수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수륙 양공 작전을 펼쳤으나 수군의 비사성 함략이 저지되면서 육군에 보급이 끊긴 것이 수나라 패퇴의 주원인이 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중원에서 고구려로 진입하는 데 육로의 관문이 요동성이라면, 해로의 관문은 바로 비사성이다. 그래서 비사성에서는 당나라 때도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비사성 장대에 올라서면 서쪽으로는 진저우만(발해만), 동쪽으로는 다롄만(황해)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이곳에 서서 침입해 들어오는 수나라와 당나라 함대를 지켜보며 결전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비사성에 깃들어 있는 선조들의 기상과 애국심, 외적을 막아낸 숭고한 희생은 천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이곳을 찾는 후손들을 숙연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