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육군 제11기동사단 소속 K2 전차가 호국훈련 일환으로 10월 18일 경기 여주시 일대에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대러 최전선 폴란드 부대에 한국산 무기 배치
12월 6일(현지 시간) 폴란드 그디니아 항구에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K2 전차 입하 환영식이 열렸다. [뉴시스]
폴란드는 냉전 시절 주력 전차와 장갑차, 화포, 항공기를 자체 생산한 기술·산업 강국이었다. 탈냉전 시대에도 고유 모델의 전차와 장갑차·자주포 등을 내놓으며 방위산업을 유지했다. 다만 군비 축소 시대에 급격히 쪼그라든 무기 시장에서 첨단기술을 앞세운 서유럽 선진국 거대 방산기업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자국군 수요마저 줄면서 폴란드 방위산업은 오랜 기간 표류했다.
AHS 크라프(Krab) 자주포의 실패는 탈냉전 이후 위기에 몰린 폴란드 방위산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크라프는 영국제 AS-90M 자주포 포탑을 가져다 폴란드제 차체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개발됐다. 문제는 개발에 15년 넘게 걸린 데다, 그 결과물에서 주포를 쏠 때마다 차체가 요동치는 심각한 결함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결국 폴란드는 한국 K9 자주포 차체를 가져와 자국 차체를 대체해야 했다. 한국과 협업으로 완성한 개량형 크라프는 성능이 뛰어난 자주포로 환골탈태했다. 이를 계기로 폴란드는 한국 방산업계의 우수한 기술력과 뛰어난 사업 관리 능력에 주목하게 됐다. 최근 폴란드 정부가 천문학적 규모로 한국산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한 배경이다.
폴란드는 한국과 손잡고 유럽 방위산업 및 안보의 판을 바꾸려 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진 유럽 안보 환경에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최전선 국가로서 지위를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폴란드는 무기력해진 서유럽 방산업계를 대체할 ‘나토의 무기고’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도 갖고 있다.
독일 몽니에 차세대 전차 사업 배제된 폴란드
폴란드가 방산 자주화에 나선 배경엔 그간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와의 해묵은 감정도 작용했다. 우크라이나발(發) 안보 위기가 고조되기 전까지 폴란드는 이렇다 할 대규모 군비 증강 계획이 없었다.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가깝지만 집단방위기구인 나토에 가입했기에 당장 침공을 우려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군비 투자에 필요한 재정 여력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당초 폴란드는 장갑차, 자주포 등 상대적으로 기술 난도가 낮은 무기부터 천천히 자체 개발할 계획이었다. ‘나토 표준화’ 압박에 직면한 전차 전력은 나토 동맹국과 협력해 공동개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폴란드는 2010년대 중반 독일, 프랑스가 주도하는 차세대 전차 공동개발 사업(MGCS)에 참여하려 했다. 폴란드의 전차 수요는 독일, 프랑스군을 합친 것보다 규모가 크다. 결국 사업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독일의 비토로 폴란드의 MGCS 참여는 무위에 그쳤다. 폴란드가 대안으로 고려한 전차는 미국 M1A2였다. M1A2는 내수용과 수출용의 성능 격차가 대단히 커서 폴란드군이 요구한 작전 성능을 충족하지 못했다. 미군용 M1A2는 전차포탄과 장갑재에 ‘열화우라늄’을 사용해 공격력과 방어력 면에서 최강이다. 반면 수출용 M1A2는 텅스텐 포탄과 일반 복합 장갑재를 사용한 탓에 러시아제 최신 전차인 T-14 ‘아르마타’에 맞설 수 없다.이런 와중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폴란드는 미국과 나토의 압박에 못 이겨 자국 T-72 전차를 우크라이나에 공여했다. 전력 공백을 급히 메워야 한다는 불안감이 폴란드 조야에서 높아졌다. 폴란드는 납품이 빠르고 기술이전을 통한 현지 생산이 가능하며 러시아 T-14에 맞설 만한 성능을 갖춘 전차가 필요했다. 유일한 대안이 한국 K2 흑표 전차였다.
현대로템은 2010년대 중반부터 폴란드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지 PGZ그룹을 중심으로 K2 전차 판촉에 나섰다. 폴란드 성인 남성의 체구가 한국인보다 크다는 점에 착안해 보기륜을 하나 더 늘리고 차체와 포탑을 확대한 현지화 버전도 제안했다. 현대로템 측 아이디어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폴란드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천명하고 현대로템의 아이디어를 수용해 자국군 기갑 전력 현대화에 나섰다. K2PL로 명명한 현지화 버전을 최소 800대 이상 구매할 예정이다. 아직 K2PL 개발 계약을 체결하기 전임에도 ‘규모 경제’를 키워 생산 및 유지비용을 낮추고자 이웃 동유럽 국가에 K2 전차 홍보에 나섰다.
K2PL로 부품 수출·기술 로열티 기대
현대로템 K2 전차의 폴란드 수출형 K2PL 조감도. [현대로템 제공]
당장 동유럽 나라들만 봐도 옛 소련 시절 도입한 구형 전차를 우크라이나군에 양도하거나 폐기하고 신형 전차 구매를 추진하고 있다. 10월 국방장관이 한국을 찾아 K2 전차에 관심을 표한 루마니아만 해도 구형 전차 대체 물량이 400대가 넘는다. 불가리아(T-72 370여 대), 슬로베니아(M84A4 46대), 크로아티아(M84A4 75대), 북마케도니아(T-72 30대) 등 노후 전차를 양도·폐기한 동유럽 국가들의 소요는 900대 이상이다. 신형 전차 도입에 나선 국가는 동유럽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탈리아는 2025년부터 약 200대의 C1 아리에테를 대체할 차기 전차를 찾고 있다. 노르웨이도 최소 50대 이상 신형 전차 구매를 위한 사업을 진행 중이다. EDA 보고서의 지적처럼 2030년대 중반이 되면 현재 유럽 각국에 대량 도입된 독일 레오파르트2 전차를 대체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 전차 시장 규모는 상당히 확대될 전망이다.
폴란드는 과거 MGCS의 자국 참여를 거부한 독일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유럽 전차 시장 주도권을 독일로부터 빼앗아오기 위해 K2PL 현지 생산과 유럽 지역 판촉에 나선 것이다. K2PL이 유럽 노후 전차 시장을 석권하면 한국은 막대한 부품 수출과 기술 로열티를 기대할 수 있다. 최근 K2PL의 유럽 수출 전망은 밝아 보인다. 강력한 경쟁 상대인 독일·프랑스의 MGCS는 참여 업체들 간 밥그릇 싸움으로 개발이 장기간 표류하고 있다. 당장 완성품이 언제 나올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사업 진행이 혼란한 와중에 K2PL이 등장하자 당황한 MGCS 참여 업체들은 제각기 신형 전차 모델을 발표하고 나섰다. 프랑스 넥스터 시스템스와 독일 크라우스-마페이 베그만이 공동개발한 EMBT 모델은 괴이한 형상에 기존 기술을 짜깁기한 전차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독일 라인메탈의 KF51 판터도 급조한 탓에 내부 공간 배치가 비현실적이고 적용된 기술 역시 검증된 바 없다. 무엇보다 이들 전차들은 개발국조차 채택할 계획이 없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2030년대 한국의 성장동력 방위산업
독일 레오파르트2 전차.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