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중국 초대 총리. [위키피디아]
“도문강(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봉건시대 중국의 대국 쇼비니즘은 상당히 강했다. 다른 나라의 선물을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교류할 때도 알현하러 왔다고 했다. 중국은 천조(天朝), 상방(上邦)을 자처했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다. 우리는 이런 것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중국의 동아시아 전통 문화 ‘사유화’
필자는 문화 전문가는 아니다. 다만 중국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최근 사태의 원인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원인을 ‘중국 민족주의’ 정도로 간단히 보긴 어렵다. 좀 더 근본적으로 중국 역사교육 문제, 지식인·엘리트들의 자기 인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엔 화이론(華夷論)적 차별과 강고한 중화주의가 있다. 화이론 역사는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오늘날 중국의 화이적 세계관은 19세기 말 중화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만들어진 전통’에 가깝다. 중화주의는 현대 중국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객관적이지 못한 중국인의 자기 인식을 꼽을 수 있다. 중국 지식인과 정치인은 문화·사상의 ‘점유자’처럼 행세한다. 동아시아 전통 문화를 중국의 ‘사유재산’으로 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중국 젊은이 사이에서 고조되는 애국주의도 마찬가지다. 모두 중화주의 소산이다. 중화주의가 무엇인지 뜯어보자. 오랑캐를 문화적 예교(禮敎)로 교화하자는 태도다. 지리적으론 중화(中華)를 중심에 놓고 사방의 오랑캐(동이·서융·남만·북적)를 설정한다. 다만 여기서 천하는 모든 종족에게 열려 있다. 오랑캐도 왕자(王者)의 덕을 체화하면 오랑캐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중화주의는 역설적으로 자기 우월주의와 보편주의를 모두 가진 셈이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중화주의는 냉혹한 헤게모니 투쟁의 대상이었다. 중화주의를 정치·경제적으로 구현한 조공체제가 대표적 예다. 중화주의는 타자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중국이 모든 타자를 압도할 수는 없었다. 가령 청나라가 비교적 느슨하게 주변국을 관리한 것은 시스템의 불비 탓이었다. 결코 타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으려는 윤리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중화주의적 조공체제는 중국과 비(非)중국의 상호주의에 입각해 운영됐다. 다만 이것은 현실을 정당화하는 체계였지 이상적 왕도의 결정체는 아니었다.
‘중화민족’의 탄생
드라마 ‘조선구마사’는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송이 취소됐다. 사진은 등장인물이 조선시대 주점에서 중국식 월병과 피단(삭힌 오리알)을 먹는 장면. [SBS 화면 캡처]
서양의 근대 국가는 전통시대 기독교를 대신할 세속 종교로서 내셔널리즘을 고안했다. 청나라 말기 중국도 ‘천’을 대신할 규범적 원리를 찾아야 했다. 당시 정치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중화민족(Chinese n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는 곧 1980년대 ‘중화민족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으로 구체화됐다. 본래 문화적 성격이 강한 ‘중화’ ‘중국’ 개념이 점차 근대적 ‘내이션(nation)’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서세동점 시기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조공국을 열강에게 빼앗겼다.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의 판도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은 영토·국민을 갖춘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하는 동시에 여러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청나라의 강역을 유지해야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 정치인과 지식인이 마주한 최대 과제는 ‘제국적 국민국가’라는 전대미문의 국가 형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지금까지도 제국적 국민국가 추구는 중국의 기조다.
G2로 부상한 중국은 문화·사상 분야의 헤게모니를 위해 돈과 힘을 아낌없이 쓰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의 부상이 서양과 구별되는 대안적 근대를 제시할 수 있다는 관측이 있었다. 서양의 사회진화론과 국민국가 담론은 전통적 중화주의보다 더 강력한 문명화·식민화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서양 제국주의와 접촉한 중화주의는 오히려 근대적 형태로 더 강화됐다. 중국 근대화 과정은 ‘국민’과 ‘중화민족’을 동시에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런 국민화·중화민족화는 소수민족에 특히 더 폭력적이었다.
중국 근대화는 중화주의가 서구 중심주의의 도전과 마주해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그 진면목은 중국의 가장 큰 급소인 소수민족 문제에서 잘 드러났다. 근대적 정치·경제·군사 시스템을 도입한 중국은 자기 영토 안 소수민족을 좀 더 강하게 예속시켰다. 청나라가 느슨한 틀로 관리하던 제국의 변경도 국민국가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 포함시켰다. 중화제국이 무너졌다고 중화주의도 함께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전통시대 중국인은 자국 영향력이 세계로 무한정 퍼지는 ‘무제한’의 천하를 꿈꿨다. 그 꿈이 서양 열강에 의해 깨졌어도 제국의 영역 ‘구주’(九州: 하나라 우임금이 중국 영역을 9개 주로 나눔) 천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중화주의는 서양의 침략 속 자기 성찰 기회를 얻지 못했다. 청나라 말기부터 지금까지 중국 정치인과 지식인은 글로벌 자본주의를 체화하고 주변 타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서양 중심주의는 합리성·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자기들의 가치와 원리를 비(非)서양사회에 강요했다. 근대 물질문명 발전으로 서양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강고한 세계관을 구축했다. 현실에서 이는 타자의 식민화로 이어졌다. 성찰 없는 물질문명 발전은 타자에 대한 폭력과 지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신(新)중화제국도 마찬가지다.
“다른 문명을 떠나면 중국도 존재할 수 없다”
중국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자국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바로 고대에 이미 세계제국 면모를 갖췄던 당나라(618~907) 역사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중국을 중국답게 하는 여러 제도와 문화가 배태됐다. 그 주역은 한족만이 아니었다. 중국이 이민족과 끊임없이 협력·교류하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한 결과였다.중국의 유명 문화평론가 위치우위(余秋雨)는 “당나라 사람은 세계인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나라가 이룩한 ‘호방한’ 제국 문화는 결코 ‘중원’의 힘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치우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오늘날 중국인들이 새겨듣기를 바란다.
“장안(長安: 당나라 수도)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었고 세계 역시 장안을 무대로 삼았다. 당시 장안은 다양한 문명에 대한 경건한 숭배자였다. 단순히 자신이 다른 문명에 대해 ‘관용’을 베푼다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자신 또한 존재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중국현대사상·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신좌파·자유주의·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전통·근대·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