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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등 각종 사법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혀 개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이 드러나서다. 도덕성을 강조하며 기득권을 줄기차게 비판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자신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임이 밝혀졌다. 이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이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여러 흠집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 의지를 높이 사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서 법무부 장관 임명을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조 후보자가 야기한 작금의 사태를 지켜보며 국민의 마음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추정·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놈이 그놈…” 무력감 확산
첫째, 무력감의 확산이다. 조 후보자의 여러 의혹 가운데 국민의 마음을 가장 후벼판 것은 자녀 문제다. 그의 딸은 고교 재학 중 한 의과대학에서 짧은 인턴 과정을 거친 후 의학논문 제1저자로 등재됐다. 조 후보자의 아내와 지도교수의 아내는 둘 다 한영외고 학부모로 서로 아는 사이다. 해외 대학 진학을 꿈꾸는 학생을 배려하고자 지도교수가 제1저자로 등재해줬다. 하지만 그의 딸은 고려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거쳐 부산대 의과전문대학원에 들어갔다.보통 사람으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코스다. 부모의 능력과 인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 아닌가. 조 후보자가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됐기에 이러한 사실이 공개된 것이고, 그렇지 않은 또 다른 능력 있는 부모의 자녀들이 비슷한 경로로 누구나 염원하는 명문대나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경우가 있지 않겠는가.
‘바늘구멍’을 향해 달려온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는 허탈해한다. 우리는 해도 안 된다, 스펙을 만들어줄 재주가 없다, 그리고 설령 목표한 곳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능력 있는 부모를 둔 사람과 경쟁에서 뒤처질 게 분명하다, 라면서 말이다. 과거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그것이 도화선이 돼 정권이 교체됐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부정입학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고, ‘돈 있고 권력 있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처지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를 보내련다…. 결국 많은 이가 노력하기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다.‘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에 빠지는 것이다.
둘째, 피로감 증폭이다. 과거 인사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이 불거지면 사과나 유감 표명이 이뤄졌고,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거나 청와대가 지명을 철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 후보자 자신의 정면 돌파 의지가 분명하고 청와대도 임명을 강행할 것이란 분위기가 짙게 느껴진다. 집권 중반기에 조 후보자의 사퇴는 곧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연이은 레임덕 현상, 내년 총선에서의 불리, 그리고 정권 재창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돈다. 그러니 사활을 걸고 집권 세력과 반대 세력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 후보자의 장관 임명 또는 사퇴가 이러한 ‘대치전’을 종결시킬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 결말이 난 이후에도 세력 간 다툼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고, 국민도 내 편이냐 아니냐 서로 다툴 것이며, 동일한 사안에 대한 언론의 정파적 평가는 더욱 노골화될 것이다.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 라는 진영논리에 따른 세력 다툼이 더 치열해지고, 어느 정당 소속이냐에 따라 싸움이 더욱 복잡해지며, 대선이 다가올수록 현 정권 유지 또는 교체로 양분돼 크게 싸움이 붙을 것이다. 국민은 불 보듯 뻔한 이런 상황 전개를 내다보고 벌써부터 피곤하다.
주변 성향 살피는 ‘과잉경계’의 일상화
셋째, 불신과 의심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조 후보자 관련 의혹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여러 의혹이 있더라도 그가 장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꽤 있다. 그의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결국 그가 장관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도 적잖다.그렇기에 사람들은 조심한다. 어쨌든 그는 현재 살아 있는 권력이요, 그중에서도 실세라고 세간에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 후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의 반응을 살핀다. 그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과연 내 생각과 말에 동조할지 아니면 비난할지 신경 쓰는 것이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힘이 더 세다.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불신과 의심의 마음을 안고 살 것이다. 심지어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추후 자신의 마음이 바뀐 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자나 변절자로 여길까 봐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러니 눈 크게 뜨고 주변을 과잉경계하며 사회생활을 한다. 이는 집권 세력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혹시 정권이 바뀌면 반대 세력이 나를 음해하거나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까. 누군가는 불신과 의심에 그치지 않고 이를 확실한 시나리오로 여기며 더욱더 정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넷째,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이다. 이번 사태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일이 이처럼 커질 줄은 본인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조 후보자만은 아니다. 최근 한반도 정세를 보자. 일본과의 대립구도는 점차 깊어지고, 동맹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을 “돈 낭비”라고 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민족으로서 북한을 끌어안으려 노력했건만, 오히려 북한은 남한을 비하하고 있다. 독도 영공을 침범한 중국과 러시아도 사과 한마디 없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세가 이처럼 복잡하게 정신없이 흘러가니 불안할 수밖에. 반일 구호를 외치며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나서면 기분은 통쾌하지만 이런다고 우리 경제가 나아질까 싶다. 미국이 한국을 계속 지켜줄까,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자주국방이 과연 가능할까,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될까, 한국이 계속 발전할 수 있을까. 이래저래 불안하다.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될 때 인간의 생존 본능이 발동된다. 존립 자체에 불안을 느끼는 우리 국민의 마음을 정치인들이 잘 헤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