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킹 와인 레이블. [사진 제공 · 오린 스위프트]
21년 전 법학도가 설립한 와이너리
앱스트랙트 와인 레이블. [사진 제공 · 오린 스위프트]
그는 50여 군데에 이력서를 보냈는데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와이너리에서만 회신이 왔다. 로버트 몬다비는 작업복 대신 정장을 입고 찾아갈 정도로 와인에 무지하던 그를 채용했다. 피니는 밤낮없이 일했다. 어느 날 그는 이 열정을 자신의 와인을 만드는 데 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피니는 아버지의 미들네임인 오린과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스위프트를 따 ‘오린 스위프트’라고 명명한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1998년 피니가 처음 만든 와인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빈티지를 통해 ‘와인을 만드는 데는 완벽한 비법이나 엄청난 비결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최고의 포도를 우수한 밭에서 정성껏 재배한 뒤 와이너리로 가져와 망치지 않고 발효시키는 것이야말로 좋은 와인을 만드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피니의 겸손한 와인 철학과 달리 레이블은 파격적이다. 모든 레이블에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어느 날 피니가 운전하고 갈 때 라디오에서 ‘당신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군요, 마네킹’이라는 노래 가사가 흘러나왔다. 여기에서 착안해 마네킹 레이블이 탄생했다. 좋은 와인은 마네킹처럼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다는 의미다. 와인 레이블에는 팔 없는 마네킹이 늘어서 있는데 그는 이 컷을 얻고자 사진을 1만 장이나 찍었다고 한다.
피니는 이 노래를 듣고 화이트 와인을 떠올렸고, 샤르도네로 만든 와인에 마네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네킹은 질감이 부드럽고 맛이 산뜻하며 복숭아, 멜론 등 과일향이 풍부하다. 어떤 옷을 입혀도 소화하는 마네킹처럼 이 와인은 모든 음식과 두루 어울리고 편하게 즐길 수 있다.
또 다른 와인 ‘앱스트랙트(Abstract)’는 그르나슈, 시라, 프티트 시라를 블렌딩해 만든 레드 와인이다. 레이블은 한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사진 콜라주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피니는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잡지를 10여 권씩 구매하는데, 이 레이블을 위해 그는 3년간 비행기 안에서 잡지들을 훑고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잘라 모았다고 한다.
앱스트랙트는 각기 다른 곳에서 자란 포도가 만나 다양한 기후, 토양, 아로마 등이 조합돼 캘리포니아의 모든 면을 보여준다. 여러 과일향, 라벤더 같은 꽃향, 톡 쏘는 향신료향이 어우러져 우아한 복합미를 뽐낸다.
레이블에 예술 감각 표출, 맛 또한 예술
팔레르모 와인과 간장전복 요리. 팔레르모의 복합미는 간장향이 나는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사진 제공 · 오린 스위프트]
팔레르모는 카베르네 소비뇽에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을 소량 섞어 만든 와인이다. 보편적인 블렌딩이지만 팔레르모에서는 뭔가 특별한 것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질감 속에서 정교함이 느껴지고, 농익은 과일향이 달콤하지만 허브와 향신료향이 위엄을 더한다.
파피용 와인 레이블. [사진 제공 · 김상미, 사진 제공 · 오린 스위프트]
최근 서울에서 열린 오린 스위프트 레이블 전시회. [사진 제공 · 오린 스위프트]
로마 신화에서 전령의 신 머큐리는 날개 달린 투구와 신발을 신고 등장한다. 날쌘 머큐리처럼 이 와인은 탄탄한 보디감과 매끈한 질감을 자랑한다. 블랙베리, 블루베리, 검은 체리 등 잘 익은 베리향과 커피, 다크초콜릿, 감초 등 다양한 향미가 농밀한 매력을 자아낸다.
레이블을 들여다보면 와인 맛이 잘 어울리는 작품을 음미하는 느낌이다. 오린 스위프트는 나만의 갤러리에 앉아 눈으로도 즐기는 예술 같은 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