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철 기자]
외환위기 당시 정부 실무자 가운데 한 명이던 허경욱(63) 전 기획재정부(기재부) 차관(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은 11월 16일 ‘주간동아’와 인터뷰에서 “외환 쪽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적다”고 했다. 그렇다고 “위기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는 “한국 경제가 20년 전처럼 ‘급성폐렴’에 걸리진 않겠지만, ‘만성질환’ 환자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크다”며 “하루빨리 과감한 규제 철폐와 노사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재부에 재직하면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근무했고, 기재부 제1차관과 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 OECD 연금기금관리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또 세계은행, IMF 등 국제금융기구에서 일하거나 몸담은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의 모임인 ‘브레튼우즈클럽’ 회장직을 맡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현 기재부) 특별대책반 반장이었다. 어떤 일을 했나.
“잘 알다시피 우리 정부는 1997년 12월 3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IMF와 구제금융에 대한 합의를 이뤘다. 그리고 이듬해 1월부터 실무협상이 개시됐는데, 특별대책반이 그 일을 맡았다.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면서 재무부 국제금융국을 없앴다. 국제금융국이 있었더라면 외환위기 사태에 보다 잘 대비했을 텐데…. 아무튼 IMF와 실무협상을 할 팀이 필요해 특별대책반을 급조했다.”
고금리 장기화는 아쉬워
1997년 12월 3일 서울 종로구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아랫줄 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아랫줄 가운데)이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21년 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초유의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이 뭐라고 보나.
“경기 순환적 원인, 구조적 원인, 부족했던 대처 능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아시아지역으로 많은 자금이 유입됐다. 그 돈이 태국에선 부동산으로, 한국에선 중복 과잉투자로 흘러들어갔다. 기업들이 너도나도 남의 돈을 가지고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에 뛰어들었다. 도저히 효율이 날 수 없는 거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전국 각 시도를 돌며 임금, 땅값, 물가 등에서 고비용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김현철(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스캔들이 터졌고, 대선을 앞두고 여야 간 대립이 치열했다. 정치권 리더십이 상실돼 뭐 하나 되는 게 없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몰랐던 건 아니다. 우리의 거버넌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 사진 제공 · 영화사 집]
“우선, ‘IMF 위기’라고들 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IMF가 아니라 우리 경제가 위기였다. 불난 집에 달려온 소방차한테 ‘소방차가 위기’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후적으로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은 아쉬운 대목이다. 재정 적자폭이 커져 경제위기에 봉착한 남미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재정이 건전했다. 펀더멘털의 위기라기보다, 단기적으로 돈이 돌지 않는 자본계정의 위기였다. 이는 IMF로서도 처음 겪는 종류의 경제위기였다. IMF가 이 사실을 금방 깨달아 재정을 풀라고 했고, 재정긴축에 따른 데미지(damage)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의 지방 공무원들이 참으로 존경스러운 것이 돈을 쓰라고 해도 안 쓰더라. 나라가 망할 판국에 돈을 쓸 수 없다면서.”
연이율 20~30% 고금리 정책 때문에 흑자 도산이 많았다.
“IMF는 외환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니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우리 정부는 고금리로 기업이 다 죽는다면 외환 안정이 무슨 소용이냐며 많이 싸웠다. 어렵사리 ‘당분간(for the time being)’ 올린다고 합의했다.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부터 듣기로는 ‘당분간’이란 2주가량을 뜻했다. 하지만 1998년 3월까지 고금리가 유지되면서 충분히 살 수 있는 기업들도 부도를 맞았다. 금리를 좀 더 빨리 내렸더라면 국민 고생이 덜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허 전 차관은 지난해 방한한 휴버트 나이스 전 IMF 아시아·태평양국장을 만났던 일화를 소개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 대한 고강도 구조조정 정책을 담당한 나이스 전 국장이 “고금리 정책을 좀 더 빨리 철회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IMF 때문에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비켜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가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누적해왔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닥치자 쉽게 무너진 것이다. 불 끄러 온 소방관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귀중품까지 물에 적셨다 해도, 소방관의 도움으로 불을 끈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요즘 ‘외환위기가 한 번 더 오는 것 아니냐’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지만,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최근 사상 처음으로 4000억 달러(약 452조2000억 원)를 초과했고, 외국에서 받을 돈이 갚아야 할 돈보다 역대 최고로 많다. 경상수지도 60개월 이상 연속 흑자다.
“20년 전 하도 고생해 외환 대비만큼은 철저히 하고 있다. 외환 쪽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를 돈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급성폐렴에 걸린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이제부터는 한국 경제가 만성질환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구조개혁을 하지 않았다. 비효율과 비능률, 모순이 곳곳에 쌓여 있다.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산업의 각 분야에서 경고음이 나오고 일자리 상황도 좋지 않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둔감함
요즘 특히 제조업 경기가 안 좋다.“주요 국가 중 제조업 비중이 가장 큰 나라를 꼽자면 중국, 그리고 한국이다. 제조 강국 독일과 일본도 제조업 비중이 20%대인데, 한국은 30%를 넘는다. 산업구조가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력 산업인 제조업이 사양산업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게 혁신을 수용하는 경제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 과잉 중복투자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 걱정이다.
“기업들 얘기를 들어보면 규제에 막혀 있어 새로운 사업을 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조선, 철강은 성숙기에 접어든 산업이고, 자동차는 과잉 경쟁체제다. 타개책으로 새로운 분야에 투자해야 하는데, 그 길이 막혀 있다. 원전산업이 하루아침에 쇠퇴한 것에서 보듯 정책의 불확실성도 크다. 최저임금은 또 크게 오르고, 내년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식으로 시행되면 사업주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사람을 안 뽑고 사업을 확장하지 않는다. 혹은 해외에서 기회를 찾거나. 이런 분위기가 기업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허 전 차관은 “외환위기가 다시 올 가능성은 적지만, 위기가 가져오는 결과는 20년 전의 그것과 유사할 수 있다”며 “현재 우리 경제가 슬로 버닝 위기(Slow Burning Crisis) 초입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슬로 버닝 위기란 서서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위기를 맞닥뜨린다는 뜻이다. 그는 10월 발표된 세계경제포럼의 2018년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를 일례로 들었다.
“한국은 종합순위가 15위인 반면, 노사협력 순위는 124위로 나왔다. 이걸 보고 깜짝 놀라야 정상인데, 다들 ‘그런가 보다’ 한다. 위기인데 위기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마치 ‘혈압이 높다고?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국가에는 노년기가 있을 수 없다. 쌓여 있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위기에 내몰린다.”
뭘 해야 할까.
“과감한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디레귤레이션(deregulation·규제 철폐)과 노사관계 개선이다. 기득권을 유지하려고만 하는 것은 굉장히 불공정한 일이다. 신산업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혁신과 구조조정을 하려 해도 강성 노조에 막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논의에 끼고 싶진 않다. 어쨌든 투자가 일어나야 경제가 좋아진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실업급여 금액을 높이면서 기간도 늘려야 한다. 직업훈련도 현실에 맞게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외부적으로는 미·중 무역 갈등 등이 우려된다.
“세계경제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현재 4차 산업혁명 등 세계경제가 커다란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오고 있다. 그에 따라 경기 하강 효과가 당연히 나타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혁신적 포용국가’를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은 사회 구성원에게 그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되는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허 전 차관이 한때 몸담았던 OECD가 주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정부의 혁신적 포용국가 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백번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실행의 묘를 도모해야 한다. 혁신은 기업이 할 일이고 포용은 국가가 할 일이다.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기업의 기(氣)를 살리면서 혁신을 꾀하고, 사회안전망 강화 등 포용 정책을 도모해야 한다.”
국제금융 엘리트 모인 ‘브레튼우즈클럽’
“국제금융은 안면장사 … 남북경협 돕겠다”
미국 워싱턴DC에 자리한 국제통화기금(I M F) 본부. [위키피디아]
회원의 면면은 화려하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 등 장관 출신만 20여 명에 달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조윤제 주미대사도 회원이다. 소훈섭 세계은행 한국사무소장, 박준영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 한국사무소 대표와 최근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으로 발탁된 권구훈 골드만삭스 전무 또한 ‘정부 밖’ 회원이다. 초기 10여 명에 불과하던 회원 수는 현재 200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등 정부 기관에서 세계은행, IMF 등으로 파견을 나가는 인원이 갈수록 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금융기구에 직접 합류하는 한국인도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튼우즈클럽은 1년에 한두 차례 정기모임, 비정기적인 소모임, 그리고 분기별 소식지 발행 등으로 친목을 도모한다. 느슨하면서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허 전 차관은 “한 마디로 국제금융이 곧 안면장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뢰라는 뿌리에서 금융이라는 나무가 자라듯, 오랜 인연으로 쌓아올린 신뢰가 뒷받침될 때 한국이 국제금융 분야에서 국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 전 차관은 “국제금융기구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 네트워크를 국가 자산으로 여기며 잘 관리하는 것이 국익에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브레튼우즈클럽은 장기적으로 남북경협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가 북한 경제개발에 관심이 많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허 전 차관은 “우리 회원들이 북한 경제에 관해 컨설팅을 해준다거나, 적합한 인재 · 기관과 연결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금융기구의 자금, 그리고 옛 공산권 국가들의 경제를 개발해온 노하우를 활용하는 것이 북한 경제개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는 “남북경협을 위해서는 앞으로 국제금융기구의 자금을 많이 끌어와야 하는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에 한국 부총재가 없는 것이 아쉽다”며 “다행히 실무자급에는 한국인이 상당수 있으므로 출자 지분을 꾸준히 늘리면서 이런 인재들을 계속 키워나간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