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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틈을 안 보이는 환자들
드라마 속 남편의 증상은 의학적으로 ‘질투형 망상장애’(의처증)일 개연성이 높다. 장지순 서울특별시은평병원 의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망상장애의 문제는 환자 본인이 자신의 망상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망상장애 환자 대부분은 본인의 생활에 별 불편함이 없다고 느끼며 치료를 거부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망상은 사고(思考)의 이상 현상으로, 개인이 속한 사회나 집단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믿음을 뜻한다. 뚜렷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의학계에서는 ‘뇌 손상 같은 생물적 요인’과 ‘불안감, 공포감 등 정신적 요인’으로 추정한다. 망상장애는 동일한 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말하며 다음과 같이 7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먼저 ‘색정형’은 유명 연예인 같은 특정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경우로, 여성에게 나타나는 망상장애 가운데 가장 흔한 유형이다. 아이돌 스타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사생팬’이 그 예로, ‘나는 스타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믿음이 지나쳐 연예인의 집에 무단 침입하거나 사생활을 방해했다면 색정형 망상장애로 볼 수 있다. ‘과대형’은 스스로 위대한 능력을 가진 신적인 존재라고 착각하는 유형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자신이 공중부양을 한다든가, 신과 소통해 지구에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고 믿는 증상이 이에 속한다. ‘질투형’은 부부, 연인관계에서 상대방이 바람을 피웠거나 피울 가능성을 의심하는 유형으로 자살이나 타살 위험성이 있다. ‘피해형’은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믿는 경우로, 남성에게 나타나는 망상장애 가운데 가장 흔한 유형이다. ‘신체형’은 자신의 건강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뇌가 썩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고 믿는 경우다. 그 외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혼재형’, 이들 유형에 해당하지 않는 ‘비정형형’이 있다.
망상장애는 주위 사람들이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망상을 가진 분야 외에는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남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꼼꼼히 생활한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40대 회사원 A씨는 피해형 망상장애를 앓았지만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 누구도 그의 망상증을 눈치 채지 못했다. A씨는 평소 경쟁관계였던 동료 B씨가 먼저 부장으로 승진하자 B씨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A씨의 피해망상이 커져 A씨는 B씨가 손에 펜을 쥐는 모습을 봐도 ‘저 펜으로 언젠가 내 목을 찔러 나를 죽일 것’이라고 믿거나, ‘산에서 살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B씨가 속한 사내 등산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A씨는 B씨와 둘만 남아 야근하던 중 B씨를 칼로 찌르고 말았다. A씨의 거래처 관계자는 “A씨에게 정신질환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신뢰를 주는 직원이었고 가정에도 헌신적인 가장처럼 보였기 때문에 피해망상 환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충격이 무척이나 컸다”고 말했다.
치료해도 회복률 50%밖에 안 돼
망상장애의 또 다른 특징은 환자가 망상에 대해 가진 믿음이 견고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완치가 쉽지 않고 일반적인 회복률은 50%에 그치며, 20%만 증상이 완화되고, 30%는 증상이 유지되거나 악화된다.60대 여성 C씨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피워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경우다. 평소 정상적으로 생활해오던 C씨는 어느 날 가족에게 “죽을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달째 변비가 지속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C씨는 종합병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의사는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C씨는 “의사가 내 병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제 죽을 몸”이라며 1년 동안 규칙적인 식사를 거부했다. C씨는 몸무게가 50kg대에서 1년 만에 30kg대 초반까지 줄어드는 등 건강이 극단적으로 악화됐지만 “병원에는 안 가겠다”고 우겼다. 그동안 C씨를 돌보느라 가족의 삶은 피폐해졌고 가정불화도 생겼다.
망상이 심하면 자해나 타해 위험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홀로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D(67)씨는 1년 전부터 경찰서와 구청, 주민센터에 수시로 찾아가 직원들에게 욕을 하며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D씨는 “관공서 직원들이 나의 기초생활수급비를 가로챘는데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수사한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D씨는 믿지 않았다. D씨는 1년 동안 “구청 직원들이 나를 속이고 있다”며 경찰서에 민원 수십 건을 제기했다. 구청, 민원센터 직원들이 “D씨 때문에 무서워서 업무를 못 하겠다”고 호소하자 경찰은 D씨를 정신전문병원으로 데려갔다. D씨는 피해형 망상장애 진단을 받고 두 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
국내에서 망상장애 환자 수 통계는 전무한 실정이다. 미국에서는 망상장애 환자 비율을 전체 인구의 0.03%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 전문가들은 “망상장애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까지 합치면 실제 통계 수치는 훨씬 높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환자가 자신의 정신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외견상 멀쩡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망상장애를 앓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지순 의사는 “그 사람의 망상적 의견에 찬성·반대를 논하지 마라. 그 대신 ‘그런 생각 때문에 당신이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를 하라”고 말했다. 찬반을 주장하는 즉시 환자의 망상은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장 의사는 “망상장애 환자는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믿고 주변 사람들을 불신하기 때문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정신과 전문의에게 치료받게 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