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의를 마친 여야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동아일보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지위와 구실이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새누리당 안에서 보면 당대표로 당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주류이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박근혜(비박)계로 여겨진다. 그뿐 아니라 가슴에 금배지를 단 현역의원이란 점에서 기득권층에 속한다.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의 경우 당 지도부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주류다. 하지만 김 대표와 당권을 놓고 다퉜던 경쟁자라는 점에서는 비주류다. 박 대통령과 가까워 친박근혜(친박)계, 국회의원이란 점에서 기득권층에 속한다.
친박-비박 갈등에 가려진 현역 기득권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은 주류-비주류, 비박-친박으로 대척점에 서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같은 구분으로 보면 지금까지 새누리당이 공천 방식을 둘러싸고 친박계와 비박계가 첨예하게 대립해왔지만, 결과적으로 ‘현역 기득권’이란 공통의 이익을 지켜온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김 대표는 당대표에 오른 직후 일찌감치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며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를 공천 방식으로 제시했다. 오픈프라이머리는 인지도가 높고 지역 내 조직기반이 탄탄한 현역의원의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 또한 오픈프라이머리로 공천하면 청와대 등 당 밖에서 총선 공천에 개입할 여지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현역의원들로부터 환심을 사고, 친박계의 공천 개입을 차단할 묘수인 것이다. 2014년 7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오른 김 대표 처지로선 현재의 새누리당 권력구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내후년 대통령선거(대선) 경선에 유리하다.
새누리당이 오픈프라이머리 도입 등 공천 방식을 둘러싸고 주류와 비주류, 친박과 비박 간 갈등을 계속하는 사이 여권 내에서 ‘인적쇄신’ ‘개혁공천’ 요구는 설 자리를 잃었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오픈프라이머리 등 공천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거듭되면서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당 전면에 포진해 당을 새롭게 탈바꿈시킬 기회가 묻혔다”며 “현역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패로 오픈프라이머리가 활용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만약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지지자 사이에 ‘바꿔’ 열풍이 휘몰아쳤다면 어땠을까. 다선(多選) 현역의원들이 인적쇄신 또는 개혁공천 대상자로 몰리는 상황이 연출됐을 것이다. 그러나 공천 방법론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새누리당은 인적쇄신 대신 공천 방식을 둘러싼 계파 갈등 수준에 논의가 머물렀다.
공천 논의가 방법론에 치우친 사이 박 대통령은 “진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달라”며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신과 가까운 새로운 친박, 이른바 신박(新朴) 인사나 진실한 친박, 소위 진박(眞朴) 인사들을 측면 지원하려 한다는 해석이 많다. 하지만 19대 국회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최악의 국회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새 인물로 정치권 물갈이를 시도하는 이는 여권 내에서 박 대통령이 유일한 셈이다.
여권 한 인사는 “총선 같은 중요한 전국선거를 앞두면 인재영입위원회 등에서 새 인물을 영입하고자 활발히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내년 총선을 앞두고는 그런 활동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정치가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어 각 분야 인재들이 정치권 진출을 꺼리는 것도 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 지망생이 줄고,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인재가 정치권에 충원되지 않으면 정치의 질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역시 당권을 기준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친소관계를 기준으로 친노무현(친노)계와 비노무현(비노)계로 나뉜다. 여기에서 현역의원 여부에 따라 기득권층과 비득권층이 갈린다. 이런 구분은 새누리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친박-비박이 친노-비노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누구를 기득권 세력으로 볼 것이냐 하는 점에서는 새누리당과 큰 차이가 있다.
새누리당은 주류-비박-현역의원(기득권층)으로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된다. 내년 총선에 박 대통령을 등에 업고 나서려는 이들 가운데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김행, 민경욱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대변인 등 원외 인사가 적잖기 때문. 새누리당은 현역의원 대 신진인사란 공천 경쟁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그에 비해 새정연은 ‘주류-친노’와 ‘기득권층’이 하나로 엮이지 않는다. 문 대표와 각을 세워온 호남 현역의원이 대부분 비주류, 비노인 동시에 기득권을 가진 호남과 수도권 출신 다선의원들이다.
문재인 대표가 문-안-박(문재인-안철수-박원순) 연대를 제안하고, 안철수 의원이 이를 거부하자 새정연 안팎에서는 이를 ‘양초(兩初)의 난’으로 불렀다.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이 모두 초선의원으로 국회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을 비꼰 표현이다. 새정연 한 인사는 “문 대표는 당내 지분이 취약한 전문경영인 대표이사”라며 “당의 실질적 오너 노릇은 호남과 수도권 출신 중진들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분 작은 새정연 전문경영인 문재인
그러나 총선이 다가올수록 문 대표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전당대회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당권을 쥔 문 대표가 공천권 행사를 계기로 오너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표는 4·29 재·보궐선거 패배로 휘청거리긴 했지만 혁신위원회를 방패 삼아 버텨냈고, 비주류의 거센 사퇴 요구에는 ‘재신임 카드’로 정면 돌파했다. 문 대표가 회심의 카드로 삼는 것은 선출직평가위원회의 평가 결과. 현역의원 20%를 합법적인 근거를 내세워 물갈이하고자 데이터를 모으는 중이다.문 대표 측 한 원외위원장은 “호남 홀대론은 호남 현역의원들이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여론 호도용 얘기일 뿐”이라며 “선출직평가위원회의 평가 결과가 나오는 시점이 호남 기득권 세력과 치르는 한판 승부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당대표 선출로 친노 세력은 당권을 쥐었다. 하지만 핵심 지지기반인 호남에서는 여전히 비주류 신세다. 내년 총선 공천을 계기로 호남에서도 명실상부한 주류로 거듭나려는 친노 세력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총선 전 범야권 통합을 위한 1차 시험대와 같았던 당내 통합방안 문-안-박 연대가 좌초한 상황에서 문 대표가 꺼내 들 다음 카드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