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2

2015.06.15

‘아베 담화’ 앞두고 들끓는 일본열도

“반성과 사죄 표현 들어가야” 日 양심세력 집단행동 줄이어

  • 장원재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입력2015-06-15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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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8일 일본의 양심세력을 대표하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등 일본 지식인 281명이 도쿄 참의원회관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일본이 아시아 이웃 여러 나라 사람에게 손해와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다시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위안소 설치 및 운영은 일본군이 주체가 돼 이뤄졌다는 것이 명확해졌다”며 일본 정부가 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인 9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은 도쿄 일본기자클럽에서 대담을 갖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역사 인식을 비판했다. 1995년 8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전 총리는 아베 총리에게 “국제적 의문과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93년 8월 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낸 고노 전 장관은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군 위안부로 삼은 사건을 거론하며 “군이 명백하게 강제적으로 데려가 위안부로서 일을 시킨 사례”라고 말했다.

    끝없는 줄다리기

    하루 차이를 두고 현 정부를 비판하는 성명과 대담이 나온 것을 우연이라 볼 수 있을까. 최근 일본에서는 이 밖에도 지식인들의 공동 행동이 연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공통점은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집단적 움직임이라는 점이다.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최근 들어 이 같은 반대 운동이 활발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아베 총리가 8월 15일 발표할 예정인 ‘종전 70주년 담화’(일명 아베 담화)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종전 70주년 담화 발표 방침을 처음 밝힌 것은 2012년 12월 26일 취임한 지 닷새가 지나서였다.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그는 “무라야마 담화는 종전 50년을 기념해 나온 것이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21세기를 맞이했다. 미래지향적인 아베 내각으로서 21세기에 어울리는 담화를 발표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게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줬으며 △이에 대해 통절(痛切)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과거사 반성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시절 발표한 종전 60주년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한 반성과 사죄’ 같은 주요 표현이 반복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처음부터 ‘과거사에 대한 반성’보다 ‘미래지향적 내용’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아베 총리가 담화를 통해 무라야마 담화를 무력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대체하려 한다는 우려를 내놨다.

    우려는 조금씩 현실이 됐다. 아베 총리는 2013년 4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의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며 과거의 침략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고, 이는 한국과 중국의 항의를 불렀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도 비판 대열에 가담했다. 미국 정부마저 ‘지나친 발언’이라는 우려를 전달하자 아베 총리는 결국 “아시아인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과거 내각과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후에도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기 위한 시도는 이어졌다. 2013년 8월 종전 68주년을 맞아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총리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부전(不戰) 맹세’를 하지 않았다. 이는 역대 총리의 전통을 따르지 않은 것. 그해 말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2014년 8월 종전 69주년 행사 때도 ‘부전 맹세’를 생략했다.

    올해 들어서는 아베 담화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4월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은 이전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어떤 때라도 반둥회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국가가 될 것임을 맹세한다”고만 밝혀 무라야마 담화의 주요 키워드를 모두 생략했다. 같은 달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는 주요 키워드 중 ‘통절한 반성(deep remorse)’만 언급하며 넘어갔고,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내 생각은 역대 총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며 얼버무렸다. 이런 연설이 미국에서 어느 정도 평가를 받자, 아베 담화 역시 비슷한 수위에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아베 담화’ 앞두고 들끓는 일본열도

    6월 8일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왼쪽에서 두 번째) 등 일본 지식인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8월 발표하는 종전 70주년 담화에 사죄와 반성의 표현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목소리 커진 양심세력

    최근 집단행동에 나서는 일본 지식인들의 공감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베 담화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판단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상징하는 만큼 아베 담화가 이를 부정할 경우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나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일본의 양심세력이 전후 일궈온 성과를 무력화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직접 행동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고노 전 장관과 대담에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고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어떤 일을 없었던 것처럼 하거나 부정하는 것,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와다 교수 역시 지식인 성명을 발표한 뒤 아베 정부에 “말장난을 하지 마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최근 아베 정부 일각에서 ‘사죄보다 반성이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와다 교수는 “반성을 하면 당연히 사죄해야 하는 것”이라면서 아베 담화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아예 총리 담화에 대항하는 다양한 종전 70주년 담화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아베 담화 효과를 반감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사이타마현 주민 등으로 구성된 ‘전후 70년, 민중담화의 모임’은 6월 8일 ‘일본의 침략, 식민지 지배라는 가해의 대죄를 통절히 반성하고 싶다’는 내용의 민중담화 초안을 발표했다.

    현재로선 아베 총리가 담화에서 반성 수위를 어느 정도로 조절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분명한 건 이번 담화 내용이 향후 한일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일본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를 나타내는 시금석이 되리라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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