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5

2015.04.27

싱크탱크와 동아시아의 미래

정부 산하기관에서 민간 네트워크로 진화하는 ‘생각의 그물’

  • 피터 헤이스 미국 노틸러스연구소 소장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입력2015-04-27 1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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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식 연구조직의 대명사격인 싱크탱크는 한중일 3국에서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미국 싱크탱크가 담론 형성과 정책결정에 중요한 기능을 해온 것과 비교하면, 아시아 국가들의 싱크탱크는 그 탄생 배경만큼이나 기능도 다양하고, 각국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통해 세 나라에서 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정당화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 이들 각국 싱크탱크의 오늘과 내일을 짚어본 영문계간지 ‘글로벌 아시아’ 최신호 기획특집을 번역 소개한다.

    싱크탱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이가 떠올리는 전형적 모습에 가장 가까운 조직은 아마도 미국 랜드연구소일 것이다. 미 국방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꽤 똑똑하다는 지식인들이 철통 보안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회의실에 모여 골치 아픈 안보 문제의 해결책을 짜내고자 토론하는 모습. 아마 이 정도가 흔히들 갖고 있는 싱크탱크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싱크탱크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은 국가 정책결정자들을 위한 자문 기능이었다. 전통적인 형태의 싱크탱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지식을 정리해 전달하는 작업에 주력한다. 정치지도자나 정부 관료, 대중에게 자문을 제공하고 지식을 공공정책 분야와 연결하는 방법이 다변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기능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싱크탱크는 연구와 분석 작업을 진행한다. 기존 정부정책을 평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하며 워크숍이나 세미나, 브리핑 등을 통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이다. 일부 싱크탱크는 정부 관료를 대상으로 교육 과정을 제공하거나 정부의 인재풀 노릇을 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싱크탱크가 언론매체에 정책 현안 분석을 기고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 싱크탱크는 모두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브루킹스연구소, 카네기재단, 케이토연구소, 미국기업연구소(AEI), 헤리티지재단 등 워싱턴에 소재한 주요 싱크탱크는 모두 정책을 연구 및 분석하고, 미디어나 의회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자료를 제공하며, 몇몇 기관은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하기도 한다.



    초국가적 싱크넷의 부상

    이들은 서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거나 견해가 비슷한 다른 싱크탱크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정책적 흐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시도한다. 누가 백악관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성향이 비슷한 싱크탱크의 주요 인물들이 핵심 정책결정자로 입각하기도 한다. 랜드연구소나 미국 국방연구원(IDA) 은 계약 등의 형식으로 정부와 지속적인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소들은 매체나 선거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정부 주요 기관에 인력과 정책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싱크탱크의 ‘진짜 세계’에는 이러한 이미지보다 훨씬 다양하고 미묘한 부분이 존재한다. 예컨대 최근 눈에 띄는 흐름은 앞서 살펴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엄청난 크기의 건물과 많은 인력으로 구성된 전통적 싱크탱크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그 대신 떠오르는 개념이 ‘가상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초국가적 싱크넷(transnational think net)이다. 인터넷 발달로 전 세계에 걸쳐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공감대를 얻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아직까지 초국가적 싱크넷의 조직 형태는 지극히 다양하지만, 세계화로 기존 싱크탱크가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지점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공통적이다. 한마디로 인터넷과 카오스이론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기존 싱크탱크와 초국가적 싱크넷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아시아다. 흥미롭게도 한국이나 일본 같은 미국 동맹국에서 전통적인 형태의 싱크탱크들은 미국이 행사하는 패권과 기능을 지지 혹은 대변하고 있다. 당연히 이들은 그 조직체계나 구성에서도 미국식 싱크탱크를 모방한다. 반면 냉전 종식 이후 나타난 새로운 문제들, 다시 말해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차원의 난제들을 다루는 아시아의 싱크탱크들은 서구식 싱크탱크들과는 성격이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된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부상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싱크탱크를 규정하는 서구식 모델은 지양돼야 하고, 이제 새로운 기준이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것이다. 상당수 아시아 국가에서 국가와 싱크탱크는 분리되지 않고 대학, 연구소, 정부기관을 자유롭게 오가는 학자들과 관료들이 한데 모여 연구 활동 및 정책결정을 통합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국이다.

    동아시아연구원의 경우

    싱크탱크와 동아시아의 미래

    2014년 6월 9일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외교부와 동아시아연구원이 주최한 ‘통일한국의 외교비전과 동아시아의 미래’ 포럼에서 다나카 히토시 일본총합연구소 전략연구센터 이사장(전 외무성 외무심의관·가운데)이 발언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우수한 싱크탱크들은 아시아나 세계 전체를 다루는 정책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오랫동안 이어진 암울한 역사에 비춰보면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군부독재 종식이란 국내적 변화와 냉전 종식이란 외부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던 1980년대 후반만 해도 한국의 지식사회나 관련 기관의 저변은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교나 안보 분야 연구기관은 대부분 정부 산하에 있었다. 한국국방연구원, 통일연구원,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산하) 등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는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직 인사를 예우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연구소가 있다. 예컨대 세종연구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해 만들어진 일해연구소가 전신이다.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은 외무부 장관을 지낸 한승주 교수가 설립했다.

    반면 김병국 고려대 교수를 주축으로 2002년 창립된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전혀 다른 형태를 갖고 있다. 초국가적 싱크넷의 새로운 전형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워싱턴 브루킹스연구소를 꿈꾸며 만들어진 이 조직은 각국 주요 인사들을 자문역과 펠로 등의 형태로 조직화해 날줄과 씨줄로 연결하는 그물망 노릇을 하고 있다. 엄청난 예산과 방대한 조직체계 대신 전문가 사이의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각종 콘퍼런스를 비롯한 연구 활동이 한 해 100만~200만 달러 남짓 예산만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서구식 관점에서 보면 놀랄 만한 일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아직은 평가가 엇갈리지만, 한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개념의 싱크탱크가 다른 나라들에게 큰 자극이 되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AI를 비롯한 초국가적 싱크넷들이 ‘한국 싱크탱크의 국제적 역할 확대’를 공언하며 적극 나서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고무적이다. 특히 시민사회가 주도해 연구조직을 만드는 경험이 일천한 서구 경쟁자들에게는 한층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영어 원문은 www.globalasia.org/article/think-tanks-think-nets-and-their-evolution-in-asia 참조)

    ※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 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 아래 아시아 지역의 주요 현안에 대해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 구실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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