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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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에 드리운 크림반도의 그림자

옛 소련서 독립한 세 형제국가…러시아 침공 우려에 전전긍긍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5-03-23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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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소련에서 독립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 3국이 우크라이나 내전 사태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크림반도를 병합한 러시아의 다음 타깃이 자신들이 될까 우려하며 서방과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 과거부터 이어져온 러시아와의 악연 탓에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는 ‘슬라브 민족주의’의 희생물이 될까 염려하는 분위기다.

    발트 3국은 13세기 초부터 덴마크, 스웨덴, 독일 등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18세기 말 제정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이후 세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1918년 독립했지만, 39년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에 따라 40년 소련으로 다시 합병된다. 당시 불가침조약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나치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부 장관이 비밀리에 체결한 협정이다. 이 조약에 따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통치하고 발트 3국은 소련이 차지했다.

    발트 3국이 독립을 되찾은 것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 발트해 동쪽 연안에 있는 세 나라는 국토 면적을 모두 합해도 러시아의 100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자그마하다. 리투아니아 340만 명, 라트비아 230만 명, 에스토니아 140만 명 내외인 인구 역시 러시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들 세 나라는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 침공의 두려움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전체 인구 가운데 27%와 25%가 러시아계인데, 이들이 크림반도에서처럼 러시아와의 합병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접경 지역에 있는 나르바의 경우 주민 6만3000여 명의 80%가 러시아계다. 이들은 그간 시민권을 얻지 못해 붉은색 표지의 일반여권 대신 회색여권을 사용하고 차별도 받아왔다면서 불만을 표출해왔다.

    “마음먹으면 이틀 안에 점령”



    2014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 지역 반군을 지원해온 명분이 바로 차별을 받고 있는 자국계 주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정부가 소수 러시아계 주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면서 “마음만 먹는다면 발트 3국은 이틀 안에 점령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리투아니아는 전체 인구의 5.8%만이 러시아계지만 에너지를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천연가스는 100%, 전력도 대부분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이 나라가 항상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 중단을 우려해온 이유다.

    실제로 러시아는 발트 3국 접경 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잇달아 실시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 칼리닌그라드에서 실시한 훈련은 세 나라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고향이기도 한 칼리닌그라드는 북쪽은 리투아니아, 남쪽은 폴란드, 서쪽은 발트해에 접해 있지만 법적으로는 러시아 땅이다. 본토와 연결된 육로가 없는 이른바 ‘역외(域外)영토’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칼리닌그라드를 소련에게 양도한 바 있다.

    러시아는 이곳에서 최신예 단거리 탄도미사일 이스칸데르-M과 수십 척의 함정 및 전투기를 동원해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이스칸데르-M 미사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미사일방어(MD)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푸틴 대통령은 3월 16일 북해 함대와 서부 군관구 부대들에 전투태세 점검 훈련을 명령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은 “훈련에는 병력 3만8000명과 함정 41척, 잠수함 15척, 전투기와 헬기 110대가 동원된다”고 밝혔다.

    이러한 위협에 공포를 느낀 발트 3국은 그동안 미국과 나토의 도움을 강력히 요청해왔다. 서방국가들 또한 러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지원에 적극 나섰다. 미국은 3월 9일부터 3개월간 발트 3국에서 나토군과 함께 병력 3000명을 동원해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작전명은 ‘대서양 결의(Atlantic Resolve)’. 미군 사령관인 존 오코너 소장은 “이번 훈련은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에 발트 3국을 보호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현재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 외곽의 삼림지대에 위치한 아다지 기지에 세계 최강의 기갑부대로 알려진 육군 제1 기병사단을 주둔시키고 있다.

    발트 3국은 2004년 3월 옛 소련에서 독립한 공화국 가운데 가장 먼저 나토에 가입한 바 있다. 이때부터 나토 회원국들은 교대로 발트 3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 상공을 순찰하고 있다. 또한 나토 회원국들은 발트 3국이 러시아의 침공을 받을 경우 나토 병력을 투입한다는 비밀 작전계획도 마련해놓고 있다. 이들 나라의 영공을 방어하려고 리투아니아 조크냐이 비행장에 공군기지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나토는 이 기지에 파견하는 전투기 수를 기존 4대에서 12대로 늘렸다. 에스토니아에 제2 공군기지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러시아 침공 시 72시간을 버텨라

    발트 3국에 드리운 크림반도의 그림자
    이렇게 놓고 보면 러시아가 발트 3국을 침공할 경우 나토의 자동 개입을 피할 수 없다. 나토 안보조약 제5항은 각 회원국에 대한 위협을 회원국 전체에 대한 것으로 간주해 공동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방문해 토마스 헨드리크 일베스 에스토니아 대통령,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리투아니아 대통령, 안드리스 베르진스 라트비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 안보조약 제5항을 재확인했다. 이들 국가에 대한 안보보장을 확약한 셈이다.

    발트 3국도 자구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리바우스카이테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나토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72시간을 버텨야 한다”면서 “빠른 시일 안에 육군을 강화하기 위해 2008년 폐지한 징병제를 부활한다”고 밝혔다. 징병제 부활이 의회에서 확정되면 리투아니아는 19~27세 남성을 대상으로 매년 3000~3500명을 징집한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앞으로 5년간 징병제를 시행한 뒤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육군 병력을 2000명에서 7000명으로 늘리고 군 현대화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도 함께 공개했다.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에스토니아는 최근 탱크와 장갑차를 대량 구매했다.

    문제는 이러한 서방 측 대응이 다시 러시아의 공세적 태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나토가 발트 3국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설치하거나 미국이 MD 체계를 구축할 경우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은 한층 커진다. 그럼에도 세 나라는 이번에는 절대로 러시아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의 공세를 버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제2의 크림반도’가 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만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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