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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가족, 쓰다

매년 문집 내는 6녀1남 ‘육일회’

‘느티나무’ 아버지와 ‘조각이불’ 어머니가 만들어낸 ‘문장꾼’ 가족의 하모니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매년 문집 내는 6녀1남 ‘육일회’

매년 문집 내는 6녀1남 ‘육일회’

그동안 펴낸 가족문집 ‘느티나무’를 들고 포즈를 취한 육일회 정두경, 은경, 현주, 선근 씨(왼쪽부터).

“그 옛날 경남 진주에서 딸만 내리 여섯을 뒀으니 주위 시선이 어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딸이 많아 집안이 화목한 것 같다고 다들 부러워해요.”

정현주(68) 씨가 이야기를 꺼내자 나란히 앉은 정은경(56) 씨와 정두경(54) 씨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을 때면 부드럽게 휘는 눈매가 꼭 닮은 이들은 정태정(1922~2006), 이갑임(91) 씨 부부의 일곱 자녀 중 각각 둘째, 다섯째, 여섯째 딸이다. 이들의 맞은편에는 어머니가 나이 마흔에 낳은 귀한 외아들 선근(51) 씨가 역시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앉아 있었다. 이들은 딸 여섯(六·육)과 아들 하나(一·일)를 뜻하는 ‘육일’을 이름 삼아 ‘육일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1974년부터 매년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내고 있는 의좋은 남매들. 이들의 여행에는 배우자와 자녀, 손주까지 수십 명이 동행한다. 평일 서울에서 진행된 이번 인터뷰에는 7남매 가운데 수도권에 사는 4명만 함께했다.

17년째 이어온 가족문집 ‘느티나무’

“얼마 전에 52번이 생겼어요. 사람이 많으니 한자리에 모이면 정말 재밌죠.”

은경 씨가 말을 잇자 나머지 남매들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육일회라는 독특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남매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다들 가족 내 고유번호를 갖고 있을 정도다. 아버지를 1번, 어머니를 2번으로 삼은 뒤 큰딸부터 태어난 순서대로 번호를 정했다. 새롭게 가족이 된 이들에게는 육일회 합류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준다. 예를 들어 막내아들 선근 씨는 9번이고, 큰딸 문자(71) 씨와 결혼해 이 집 식구가 된 큰사위 조경래 씨는 10번이다. 은경 씨가 얘기한 52번은 넷째 딸 양혜(60) 씨의 손주를 일컫는다. 올 초 태어나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아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얻은 ID가 ‘육일회 52번’인 셈이다.



한 번 얻으면 평생 바뀌지 않는 이 번호와 더불어 또 하나 육일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이들이 매년 함께 펴내는 가족문집 ‘느티나무’다. 1997년 어느 봄날, 문자 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문집 제작은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남매들이 돌아가면서 편집장을 맡아 책 한 권으로 묶어내는 것. 때로는 1년에 2~3권씩 제작하기도 해 그새 23집이 세상에 나왔다. 매 권마다 여러 회원이 투고하는 글 수십 편을 싣는다. 환갑을 넘긴 남매들의 인생에 대한 통찰부터, 아직 글을 쓰지 못하는 손주들이 구술해 완성한 동시까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육일회가 품고 있는 다양한 삶의 풍경이 쏟아져 나온다.

젊은 시절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지낸 이력 덕에 ‘느티나무’ 초대 편집장을 맡았던 두경 씨는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책이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될지 미처 몰랐다. 그런데 매번 문집을 받아들 때마다 우리의 이야기를 묶어내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인지 느끼게 된다. 그 안에 담긴 글을 통해 추억을 떠올리고, 서로의 소식을 접하며, 차마 말로 전하지 못한 가족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집 제목 느티나무는 아버지 정태정 씨의 호 ‘규목(槻木)’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시절 이들을 크고 넉넉하게 품어주던 아버지처럼, 문집 ‘느티나무’는 지금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한다. 그들과 더불어 ‘느티나무’ 몇 권을 함께 읽었다. 은경 씨의 큰아들 채장진 군이 창간호에 쓴 에세이 ‘헌옷 물려받기’의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매년 문집 내는 6녀1남 ‘육일회’

‘육일회’ 2번인 7남매의 어머니 이갑임 씨가 손수 만든 조각이불.

‘동생 명진이는 나보다 더 많은 옷을 물려받는다. (중략) 아마도 명진이 옷의 10분의 9는 물려받은 헌옷일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옷은 얼마 전 물려받은 약 25년 된 청치마인데 친척 누나들이 차례대로 물려받았다. 먼저 은영이 누나(2녀 현주 씨네 둘째 딸)가 입고 그다음으로 현정이 누나(3녀 양현 씨네 큰딸)가 입었다. 현정이 누나는 은정이 누나(4녀 양혜 씨네 큰딸)에게 물려줬다. 또 은정이 누나는 서경이(6녀 두경 씨네 큰딸)에게 물려줬다. 서경이는 그 옷을 오랫동안 입다가 마지막으로 명진이에게까지 물려줬다. 아니, 마지막이 아니다. 예쁜 외사촌 동생 세원이(막내 선근 씨네 큰딸)가 그 청치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함께 한 시간, 함께 할 시간

육일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이 글을 읽으며 그동안 수없이 봐왔을 낡은 청치마를 떠올렸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형제와 자매, 그들과 함께 보낸 길고 긴 세월을 추억하게 되지 않았을까. 현주 씨는 “이것이 바로 가족문집의 힘”이라고 했다. 평생 주부로 살다 ‘느티나무’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게 계기가 돼 수필가로 등단한 그는 이후 ‘모과향 깃든 정원’ 등 몇 권의 에세이집을 냈다. 큰딸 문자 씨와 큰사위 조경래 씨도 부부 수필집 ‘짧은 편지’를 출간하는 등 ‘느티나무’는 육일회 회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여기 글에 나오는 세원이는 작년에 국문과에 들어갔어요.”

선근 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낡은 청치마 입을 순서를 기다리던 소녀가 대학생이 될 만큼 ‘느티나무’와 함께 이 가족의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선근 씨는 “세원이가 국문과에 가는 데도 ‘느티나무’가 큰 구실을 했다. 대학 입학할 때 자기소개서에 가족문집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더라. 올해 입시를 치를 때 그 학교에서 세원이의 자기소개서를 모범사례로 보여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느티나무’의 순기능은 또 있다. 은경 씨는 “가족끼리는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속마음을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그럴 때 ‘느티나무’가 서로의 진심을 알게 하는 창구가 된다”고 했다. 양혜 씨가 2002년 봄호에 기고한 글 ‘왕따유감’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혜 씨는 이 글에서 ‘우리 친정 가족들에게 나는 자칭 타칭 독도로 통한다’며 자신이 가족 안에서 알게 모르게 소외감을 느껴왔음을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시골학교 교사로 부임한 큰언니를 따라 2년 정도 가족을 떠나 살았던 경험이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언니는 산골에서 부산으로 학교를 옮겼고 나는 부모님 품으로 돌아와 고향의 학교에 다시 갔다. 내가 떠나 있는 사이에 덩치가 쑥 커버린 어릴 때 친구들이 교실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면서 돌아온 나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 집에서도 2년간의 공백을 메우기 힘들었고,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들어 혼자 돌다리 밑에서 걸레를 방망이로 어떻게나 두들겨 빨았던지 가루를 만들어 놓았던 적도 있었다’고 적었다. 현주 씨는 “동생이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 남매들 모두 그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지금은 양혜 언니가 우리 모임 총무를 맡고 있어요. 총무는 ‘느티나무’ 편집장과 더불어 육일회의 중심이죠. 여름 캠프 장소를 정하고 실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고요. 그전에도 언니가 ‘왕따’인 적이 없었지만, 이제 더는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어진 거예요.”

두경 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매년 문집 내는 6녀1남 ‘육일회’
느티나무 아버지, 조각이불 어머니

“그때 아버지가 큰언니 혼자 시골 가면 위험하다고 굳이 양혜 언니를 함께 보내서 그런 거잖아.”

은경 씨의 말 한마디에 남매들은 곧 추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들 7남매의 ‘느티나무’였던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엄격하고 보수적이었지만 자식들을 끔찍이 아꼈다. 딸 아들을 차별하는 법도 없었다. 문자 씨는 창간호에 쓴 글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엄하시다. (중략) 아버지의 눈빛 하나면 어머니나 우리들은 알아서 한다’면서도 ‘아버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상하시다. (중략)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는 언제나 참석하셨다. 학교를 다니면서 하굣길에 늑장을 부리다 늦게 오는 날이면 호롱불을 들고 마중을 나오시는 아버지가 든든했다’고 했다.

1950년대 후반, 큰딸 문자 씨를 상급학교에 보낸 것도 당시 풍토로는 남다른 일이었다. 경남 진주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던, 지금은 진양댐 건설로 수몰된 이들의 고향 ‘까꼬실’에서 문자 씨는 초등학교 여자 동급생 가운데 유일하게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돼 교장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그는 줄곧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현주 씨는 “남자들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게를 지던 시절에 우리 자매는 줄줄이 진주여중, 진주여고를 졸업해 동창이 됐다. 여섯 자매가 학교 동문이라는 인연까지 얻게 된 건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또“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준다고 하고, 용한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해도 어머니 마음 상하실까 봐 손을 저으셨던 분”이라고도 회고했다.

아버지가 든든하고 믿음직한 기둥이었다면, 어머니는 따뜻한 감성으로 이들을 포근히 감싸준 이불이었다. 두경 씨는 에세이 ‘어머니의 조각이불’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천 조각을 꼼꼼히 이어 뭔가를 만드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 바느질 보따리 속에서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색깔 고운 헝겊들은 어린 내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다닐 만큼 정정한 어머니가 각양각색 천을 마름질하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솜씨 좋게 만들어낸 조각이불과 치마, 덮개 등은 육일회 회원들 집집마다 보관돼 있다. 두경 씨는 “우리 남매는 아버지한테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하는 추진력을 받고, 어머니에게서 감수성을 물려받았다. 그 덕에 멈춤 없이 글을 쓰고 계속 책을 엮어낼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이 만든 문집 ‘느티나무’는 2002년 교보문고가 주최한 ‘패밀리북을 만들어 드립니다’ 이벤트 행사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적이 있다. 당시 심사위원이던 정호승 시인은 ‘여든에 이른 할아버지에서부터 여섯 살 어린 손자에 이르기까지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나서 다 함께 느티나무 그늘에 모여 밥과 국을 먹는 이 행복한 ‘느티나무’ 식구들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절절이 깨닫게 한다’고 평했다. 그 느티나무 그늘은 10여 년이 더 흐른 지금도 여전히 넓어지고 따스해지고 있다. “언젠가 편집장을 ‘부록(7남매의 2세, 3세를 가리키는 말)’들에게 넘겨줄 때까지 내 몫을 다하겠다”는 선근 씨의 말처럼 ‘느티나무’뿌리가 대를 이어 뻗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주간동아 2015.02.16 976호 (p30~32)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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