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4

2015.02.02

아베의 홀로코스트 추모관 참배는 정치 쇼

막강 영향력 유대계 잡으려는 속셈…역사 역주행 가속화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5-02-02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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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추모관을 방문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희생된 유대인들에 헌화하고 묵념하는 모습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이 추모관은 1억2500만 쪽에 이르는 홀로코스트 관련 자료와 생존자 10만여 명의 증언을 기록한 문서, 영상, 희생자들의 유품 등을 보관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추모 연설에서 “인간이 특정 민족을 차별하고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배웠다”며 “일본은 세계 평화에 계속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이날 아베 총리가 시도한 ‘과거사 물타기’ 발언이었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했다면서, 1100여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을 구한 나치 사업가 오스카 신들러에 빗대 ‘일본판 신들러’라 불리는 일본 외교관 스기하라 지우네를 언급했다. 당시 리투아니아 주재 영사대리였던 스기하라는 해외로 탈출하려는 유대인 6000여 명에게 일본행 비자를 발급해 미국 망명을 도왔다. 이스라엘 정부는 1969년 스기하라의 공을 기려 훈장을 수여한 바 있다.

    위안부 문제 적극적인 유대계 여론

    아베 총리의 이러한 행보가 의도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분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홀로코스트 추모관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나 침략 전쟁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은 그는 난징대학살 등 당시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최근에는 미국 교과서를 제작하는 출판사 측에 위안부 문제 부분에 대한 삭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좀 더 깊은 속내는,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로 일본에 대한 비판이 계속 제기되는 것이 유대인 인권단체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서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세계 유대인 인권단체 사이먼비젠탈센터는 2013년 12월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일본 총리가 전쟁 희생자를 추모할 권리는 갖고 있지만, 전쟁 범죄자에 대해서는 그럴 권리가 없다”면서 “전쟁 희생자를 전쟁 범죄자, 반인도적 범죄자와 함께 추모하는 일은 윤리에 반하는 것”이라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2007년 미 하원이 채택한 위안부 결의안의 공동발의자 톰 랜토스 당시 하원 외교위원장은 연방의원 가운데 유일한 유대계 홀로코스트 피해자였다.



    이후 미국 곳곳에서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지고 주 의회 등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는 과정에서도 유대인 인권단체들의 지지가 일정 부분 보탬이 됐다. 미국 내 유대인 인권단체들과 커뮤니티가 기본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하는 태도를 견지해온 덕분. 뉴욕 쿠퍼버그 홀로코스트센터는 위안부 문제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강의하고 있고, 뉴욕 유대인 커뮤니티는 2011년 12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홀로코스트 생존 할머니들의 첫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유대교 랍비인 에이브러햄 쿠퍼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직까지 사죄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에서 네 번째인 뉴저지 주 버건 카운티의 위안부 기림비는 홀로코스트 추모비 옆에 세워졌다.

    아베의 홀로코스트 추모관 참배는 정치 쇼

    2013년 7월 11일 미국 뉴욕 퀸스커뮤니티칼리지 쿠퍼버그 홀로코스트센터를 찾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앞줄 가운데)가 홀로코스트 생존자 할머니들을 만난 뒤 행사 참여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자랑하는 유대계 단체들과 커뮤니티가 미국 국내 정치나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잘 알려진 사실. 일련의 흐름을 지켜봐온 아베 총리로선 유대인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무마하는 것이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덮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가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방문한 의도는 위안부 문제 등 전쟁범죄에 대한 유대인 인권단체들과 커뮤니티의 여론을 바꾸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지난해 4월에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하는 등 유대계 여론을 의식한 아베 총리의 행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당시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를 찾았던 그는 나치 점령기에 안네 프랑크와 가족이 숨어 살던 집에 세워진 박물관을 방문해 “과거사를 겸허한 자세로 대하고 다음 세대에 역사의 교훈과 사실을 전하겠다”고 말하며 “일본과 ‘안네의 일기’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있고 많은 일본인이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해 2월부터 한 달간 도쿄, 무사시노 등 3개 도시의 도서관 38곳과 서점 1곳에서 ‘안네의 일기’를 비롯한 유대인 관련 서적 수백 권이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무마하려는 시도였다는 게 당시의 주된 평가였다.

    무라야마 담화 싹 무시한 아베

    1월 25일 아베 총리는 패전 70주년을 맞아 8월 15일 발표할 ‘아베 담화’와 관련해 “식민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의 문구를 넣지 않겠다”고 밝혀 다시 한 번 입길에 올랐다. 이날 발언은 1995년 패전 50주년을 맞아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식민지배와 침략 전쟁을 통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밝혔던 ‘무라야마 담화’를 사실상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경우 2005년 패전 60주년을 맞아 발표한 ‘고이즈미 담화’에서 무라야마 담화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한 바 있다.

    아베 총리는 문제의 담화에 “일본의 미래에 대한 의사를 담고 싶다”고 밝혔지만,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일본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음은 불문가지다. 그가 식민지배와 침략 전쟁을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전범국가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그간 한국, 중국뿐 아니라 미국 등 국제사회는 아베 총리의 역사 역주행에 우려를 표해왔다. 미 국무부는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도 아베 총리가 패전 70주년 담화에 침략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야당과 언론들 역시 아베 총리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안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 유대계 여론 무마 같은 지엽적인 방식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그의 행보가 동북아 전체에 갈등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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